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주더

朱德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86–1976 ○ 자연사

중국 홍군과 인민해방군을 창건한 총사령관, 10대 원수 중 제1인자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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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윈난군관학교 졸업, 신해혁명 참가
  • 1922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공산당 입당
  • 1927난창 봉기 공동 지휘 — 인민해방군의 기원
  • 1928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 — '주-마오' 제4홍군
  • 1930중국 홍군 총사령관, 1~4차 포위섬멸전 승리
  • 1934–1935대장정에서 홍군 총사령관
  • 1937–1945팔로군 총사령관, 백단대전 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중 제1위

류보청

刘伯承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2–1986 ○ 자연사

「외눈의 용」, 덩샤오핑과 짝을 이룬 홍군 총참모장이자 회하이 전역의 지휘관

1916년 펑두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고 「외눈의 용」이라 불렸으며, 인민해방군 창건자의 한 사람이자 1948년 11월 회하이 전역을 지휘한 전략가였다.

쓰촨의 군인으로 1916년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었고 1926년 입당해 난창 봉기에 참여했다. 소련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운 뒤 홍군 총참모장으로 대장정을 이끌었고, 항일전쟁기 129사단장으로 정치위원 덩샤오핑과 「류덩」 부대를 이루었다. 국공내전에서 1947년 다볘산 진격과 1948~1949년 회하이 전역을 지휘해 승리의 결정적 국면을 만들었다. 건국 후 원수가 되어 난징 군사학원을 세웠으며 1958년 「교조주의」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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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홍군 총참모장
  • 1937–1945팔로군 129사단장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마오쩌둥

毛泽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청 제국 출생, 중화민국 시기 활동, 중화인민공화국 사망) 중국 1893–1976 ○ 자연사

농민의 나라에 맞게 혁명의 문법을 다시 쓴 중국 혁명의 지도자

1930년 1월 5일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옛 중국 속담 “별불꽃 하나가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可以燎原)”를 인용하며 홍군의 전망을 둘러싼 비관론에 답했다.

후난성 샤오산 부근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창사에서 공부했고, 1911년 혁명과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919년 5·4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1년 상하이 제1차 전국대회에 13명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중국공산당 창립에 가담했다. 농촌 근거지와 게릴라전, 인민전쟁 전략을 발전시켰고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지도부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1월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당 주석직은 1943년에 맡았다.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이끌었고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을 파병했으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대약진 운동(1958~1962)과 1966년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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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중국공산당 창립 참여
  • 1927후난 농민운동 시찰 보고 — 농민 혁명론
  • 1934–1935대장정 — 쭌이 회의에서 실권 장악
  • 1937철학논문 《실천론》·《모순론》 발표
  • 1940《신민주주의론》 발표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1958–1961대약진 운동 — 파국적 기근
  • 1966–1976문화대혁명

쑹칭링

宋庆龄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3–1981 ○ 자연사

쑨원의 부인으로 국민당 좌파에 남아 인민공화국의 국가부주석이 된 인물

1922년 반란 때 남아 쑨원의 탈출을 엄호하며 '중국은 나 없이도 되지만 당신 없이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81년 5월 16일, 죽기 몇 주 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주석이 되었다.

상하이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 쑹씨 세 자매의 둘째로, 1915년 쑨원과 결혼했다.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정변에 반대해 국민당 좌파의 상징이 되었고 모스크바로 갔다가 1930년대 상하이에서 민권보장동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기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을 조직해 공산당 근거지에 물자를 보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1981년 사망 직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국가주석 칭호를 받았다. 동생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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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9–1975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허룽

贺龙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6–1969 ○ 옥사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후난의 사나이, 난창 봉기 총지휘와 제2방면군 사령관

후난 상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전설을 남겼고, 1927년 난창 봉기를 지휘한 뒤 제2방면군을 이끌고 대장정에 올랐다.

후난 서부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지방 무장을 이끌다 국민혁명군 군장이 되었고, 1927년 8월 1일 난창 봉기의 총지휘를 맡은 직후 입당했다. 후난·후베이 서부에 근거지를 세우고 대장정에서 제2방면군을 이끌었으며 항일전쟁기 120사단장이었다. 건국 후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과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에서 린뱌오·캉성의 공격을 받아 감금되었고 1969년 치료를 거부당한 채 사망했다. 197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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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08난창 봉기 총지휘
  • 1936–1937홍군 제2방면군 총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류사오치

刘少奇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8–1969 ○ 옥사

중국공산당의 수석 이론가이자 마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문화대혁명에 휩쓸린 국가주석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운동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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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5안위안 탄광 노동자클럽 전권대표, 중화전국총공회 집행위원
  • 1936중국공산당 북방국 서기 (화북 항일 저항 지도)
  • 1941–1943신사군 정치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
  •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에 관하여」 보고, 마오쩌둥 사상 당규약 명문화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4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 1959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가원수)
  • 1968모든 당내외 직위 박탈 및 제명

저우언라이

周恩来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8–1976 ○ 자연사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외교의 설계자

1971년 키신저와의 비밀 회담으로 길을 열어 1972년 2월 21일 닉슨을 베이징에서 맞이했고, 같은 해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으로 냉전의 삼각구도를 뒤바꾸었다.

1898년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나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한 중국의 정치가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 공산주의 조직 가입,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근무, 시안 사건과 충칭 협상의 수석 협상자 활동을 거쳤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함께 국무원 총리(초기에는 정무원 총리)에 임명되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고, 1949~1958년에는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초기 대외정책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쭌이 회의 이후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에 있었고, 문화대혁명기의 격동 속에서도 국가 행정을 유지하며 권력 균형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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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6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1949–1958외교부장
  • 1971–1972키신저 비밀 회담과 미중 정상회담으로 가는 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