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용어 사전조선로동당

박헌영

박헌영
조선공산당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0–1955 ✕ 처형

조선공산당 재건의 주역, 남조선로동당 당수

1927년 신의주 법정에서 광인을 가장해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극단적 연기로 병보석을 얻어내고, 곧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까지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이끈 최고지도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으나, 월북 후 김일성에게 밀려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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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입당, 상하이에서 활동
  • 1922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원동인민대표대회 참석
  • 1925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1928–1930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40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활동; 상하이·국내 지하운동 지도
  • 1945조선공산당 재건, 당수 겸 서기장 취임
  • 1946–1949남조선로동당 창당, 부위원장(사실상 당수)
  • 1948–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초대 외무상

최용건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관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0–1976 ○ 병사

만주 항일투쟁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을 지낸 국가원수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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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4운남군관학교 졸업
  • 1925–1927황푸군관학교 교관
  • 1936–1940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제7군장
  • 1942–1945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 부참모장
  • 1946–1955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1957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 1957–1972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97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김책

김책
중국공산당 혁명군(1949년 이전) 중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3–1951 ✕ 전시 과로사

만주 항일유격대에서 김일성과 함께 싸운 조선의 혁명군사 지도자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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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조선공산당 입당,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체포·투옥
  • 1930중국공산당 입당, 동경성구위 서기
  • 1933–1940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4사 정치부 주임, 북만임시성위 서기
  • 1942–1945소련 극동 제88국제여단 제3영 정치위원
  • 1945–1946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주도, 평양학원 초대 원장
  • 1946–1948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
  • 1948–1951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 민족보위성 부상 겸직
  • 1950–1951한국전쟁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김일성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관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12–1994 ○ 병사

소련 극동에서 귀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자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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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만주 항일 유격대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 1945–1948소련 점령기 북부 조선의 권력 기반 형성
  • 1948–1972내각 수상·노동당 지도자
  • 1961소련과 우호·협조·상호원조 조약
  • 1972–199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강건

강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관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18–1950 ✕ 전사

소련군 출신으로 남침 작전계획을 완성한 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유성철 작전국장의 증언: '바로 내 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했다. 지뢰였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만주 항일유격대와 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측근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올랐다. 1950년 5월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과 함께 남침을 위한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완성했고, 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을 지휘했다.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 8일, 금강 인근에서 후퇴하는 국군이 매설한 지뢰가 탄 지프가 폭발해 즉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며, 사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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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0만주 항일유격대 및 동북항일연군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대위 계급
  • 1946연변에서 활동 후 귀국,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 지휘
  • 1948–1950조선인민군 초대 총참모장
  • 1950.05바실리예프 중장과 남침 작전계획 완성
  • 1950.06–09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낙동강 전선 지휘

김정일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관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1–2011 ○ 병사

소련 출생 기록과 백두산 신화 사이의 후계자

1992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17년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유일한 공개 육성이었다.

1970년대부터 후계자로 공고화된 그는 1994년 김일성 사후 권력을 승계하여, 소련 붕괴 뒤의 고립과 경제위기 속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를 이끌며 17년간 국가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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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 또는 1942소련 출생 기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식 서사의 갈림
  • 1964–1974조선노동당 중앙위에서 승진
  • 1980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후계자로 공고화
  • 1991–1994인민군 최고사령관·국가 권력 승계 준비
  • 1994–201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 2000첫 남북 정상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