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용어 사전10월당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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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02–0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구치코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учков
10월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62–1936 ○ 사망

차르의 퇴위를 받아낸 옥토브리스트 지도자, 보어전쟁 의용군에서 임시정부 장관까지

1917년 3월 2일, 구치코프는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의 황실 열차에 올라 니콜라이 2세로부터 퇴위 조서를 받았다.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그 열차 안에서 막을 내렸다.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는 '10월 17일 동맹'(옥토브리스트)을 이끌며 입헌군주제와 스톨리핀 개혁을 지지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였다. 제3대 두마 의장과 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라스푸틴과 궁정을 공개 비판하며 니콜라이 2세의 적이 되었다. 1917년 3월 2일 바실리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받아냈으며, 임시정부 초대 육군해군장관이 되었으나 4월 위기로 사임했다. 이후 코르닐로프와 백군을 후원했다. 보어전쟁 의용군, 티베트 여행, 수차례 결투로 점철된 모험가적 삶을 살았고, 193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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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2보어전쟁 의용군, 부상 후 영국군 포로
  • 1906'10월 17일 동맹' 중앙위원회 의장
  • 1907–1912제3대 두마 의원, 국방위원회 위원장
  • 1910–1911제3대 국가두마 의장
  • 1915–1917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
  • 1917.03니콜라이 2세 퇴위 접수
  • 1917.03–04임시정부 육군해군장관
  • 1919–1936백군 후원, 파리 망명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프로토포포프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Протопопов

라스푸틴에 기대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린 최후의 내무장관

1917년 2월 26일, 시노드 부총장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를 묻자 프로토포포프는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50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프로토포포프는 섬유 재벌이자 10월당 두마 의원으로, 관료·경찰 경력이 전혀 없었지만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의 후원으로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1916–1917)에 임명되었다. 진행성 매독으로 환각과 정신병 증세를 겪으면서도 혁명의 위협을 무시하고 페트로그라드 식량 위기를 풀지 못했으며, 각료들과 총리의 사임 요구에도 자리를 지켰다. 2월혁명 중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해 임시정부에 투옥되었고, 1918년 10월 체카에 처형되었다. 그의 몰락과 오판은 300년 왕조의 붕괴를 앞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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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0월당 소속으로 제3대 국가두마 의원 당선
  • 1912제4대 국가두마 의원 재선
  • 1914–1916제4대 국가두마 부의장
  • 1916.04–06두마 대표단장으로 연합국 방문, 스톡홀름에서 독일 측과 비밀 접촉
  • 1916.09–1917.02러시아 제국 내무장관
  • 1917.02.28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하여 체포됨
  • 1917–1918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타간카 교도소 수감
  • 1918.10.27체카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처형됨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엥겔하르트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Энгельгардт

수비대를 막사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으로 명령 제1호를 촉발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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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3파제스키 군단·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근위 울란 연대 복무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1만주군 사령부 근무
  • 1908건강 문제로 제대, 모길료프 현 지방 자치 활동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원, 10월당·진보블록
  • 1917.02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페트로그라드 혁명 사령관
  • 1918–1919백군 의용군 대표부 정치부장(키예프·오데사), 남러시아군 선전부
  • 1920–1940프랑스·라트비아 망명, 택시 기사·경마 조련사
  • 1940–1962소련 체포·호레즘 유형(1946년까지), 이후 리가에서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