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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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Patrice de Mac Mahon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08–1893 ○ 자연사

스당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베르사유군을 이끌고 파리 코뮌을 진압했으며, 「도덕 질서」의 대통령이 된 원수

1871년 5월 베르사유군 사령관으로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1873년 대통령이 된 뒤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공화파가 의회 다수당이 되자 1879년 사임했다.

아일랜드계 귀족 가문 출신 군인으로 알제리 정복과 크림 전쟁의 말라코프 공격, 1859년 마젠타 전투로 원수와 공작이 되었다. 1870년 샬롱군을 이끌고 메스를 구하러 가다 스당에서 부상당해 황제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독일에서 풀려난 뒤 티에르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1871년 5월 파리에 진입했고, 피의 주간의 진압과 대량 처형이 그의 지휘 아래 벌어졌다. 1873년 티에르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왕정복고를 기다리는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의회와의 충돌에서 패한 뒤 187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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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7프랑스군에 입대했다.
  • 1855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말라코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 1859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해 원수와 마젠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 1864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됐다.
  • 1870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다 스당 전투에서 부상당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포로가 됐다.
  • 1871티에르 대통령 아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5월 파리 코뮌 진압을 지휘했다.
  • 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돼 「도덕 질서」 정책을 추진했다.
  • 1877–1879의회와의 대립 뒤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1879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막심 베강

Maxime Weygand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67–1965 ○ 자연사

승리의 참모에서 패배와 협력의 장군으로

1940년 6월 12일, 베강은 프랑스 정부에 항복을 권고했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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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88생시르 군사학교와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
  • 1914–1918포슈의 참모장 및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
  • 1918콩피에뉴 휴전 협상에서 조건 낭독
  • 1920폴란드 국제연합군사사절단 군사 고문
  • 1923–1924레반트 고등판무관
  • 1931–1935프랑스 최고전쟁위원회 부의장 겸 육군 감찰관
  • 1940.05–06프랑스군 총사령관, 휴전 권고
  • 1940.06–1941.11비시 국방장관 및 북아프리카 총대표
  • 1942–1945독일에 억류, 이터성에 수감
  • 1948반역 혐의 무혐의 처분

장 시아프

Jean Chiappe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78–1940 ✕ 격추사

좌파에 엄격하고 동맹에 관대했던 파리 경찰청장, 그 해임이 2월 6일의 도화선이 되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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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코르시카 아자시오에서 출생
  • 1900년대–1926경찰 행정의 요직을 거치며 승진
  • 1927–1934파리 경찰청장
  • 1934.02.03달라디에가 해임, 모로코 총감 제안을 거부
  • 1935–1940파리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음
  • 1940.11비시의 레반트 고등판무관 임명, 부임 길에 격추되어 사망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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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기병학교 수료, 장교 임관
  • 1914–1918제12용기병연대·제93보병연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1–1926모로코 주둔, 리프 전쟁 참전
  • 1940제14보병사단 사단장, 프랑스 전투
  • 1942–1943몽펠리에 제16군관구 사령관, 비시 명령 거부로 투옥·탈출
  • 1943–1945육군 B 및 프랑스 제1군 사령관, 해방전쟁 지휘
  • 1950–1951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극동원정군 총사령관

조르주 티에리 다르장리외

Georges Thierry d'Argenlieu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9–1964 ○ 자연사

고등판무관으로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워 인도차이나 전쟁의 길을 연 수도사 출신 제독

1946년 6월 1일,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협상 중일 때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일방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과의 충돌을 격화했다.

브레스트 출신의 해군 장교로 1차 대전 뒤 카르멜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2차 대전 때 해군으로 돌아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해군을 이끌었다. 1945년 10월 31일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해 식민 행정의 복구를 맡았다. 1946년 베트민 지도부가 프랑스에서 협상하는 동안, 3월 6일 호–생트니 협정을 어기고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세워 사실상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 하이퐁 포격 등 강경책을 이끌다 1947년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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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카르멜회에 입회해 수도사가 되었다.
  • 1940드골 휘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 1945드골에 의해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지명되었고, 10월 31일 현지에 도착했다.
  • 19466월 1일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11월 랑선과 하이퐁의 무력 장악을 지지했다.
  • 19473월 4일 프랑스 정부가 그를 소환하고 직위에서 해임했다.

앙리 나바르

Henri Navarre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98–1983 ○ 자연사

프랑스 극동원정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 요새화를 결정해 1954년 패배를 맞은 장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투입하고 요새화를 명령한 나바르는 1954년 3월 시작된 포위전에서 철수를 명하지 않았으며, 5월 요새가 함락되어 프랑스의 협상 입지가 무너졌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53년 5월 살랑의 뒤를 이어 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부임 직후 본국 정부에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교착이라고 보고했다. 도시와 주요 도로를 지키며 베트민을 협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나바르 계획」에 따라, 라오스로 가는 베트민의 길목을 막으려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낙하산 부대를 내려 요새를 세웠다. 1954년 5월 요새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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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기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 1942–1945독일에 맞선 활동으로 소환되자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해방전에서 제1군 기갑연대를 지휘했다.
  • 1945–1953준장이 되어 독일에서 복무했으며 제5기갑사단장과 알퐁스 쥐앵 원수 참모장을 지냈다. 1948~1949년에는 알제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 1953–1954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으며, 요새 함락 뒤 교체되었다.
  • 1956육군에서 퇴역하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한 저서 《인도차이나의 고통》을 출간했다.

라울 살랑

Raoul Salan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99–1984 ○ 자연사

인도차이나 전쟁의 프랑스군 사령관이자 OAS 지도자였다.

살랑은 1952~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뒤 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를 맡았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해 1961년 4월 장군들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실패 뒤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지를 주장하는 비밀 무장조직 OAS를 창설·지휘했다. OAS는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테러와 폭력을 벌였다. 1962년 체포되어 종신 구금형을 받았으며, 1968년 사면·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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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3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58–1960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
  • 1961–19624월 쿠데타 가담, 이후 OAS 지도자
  • 1962체포되어 종신 구금형 선고
  • 1968사면·복권

크리스티앙 드 카스트리

Christian de Castries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902–1991 ○ 자연사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를 지휘하다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된 프랑스 장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패전 뒤 포로가 되었다. 석방 후 사단장과 기업 경영자를 거쳐 군에서 은퇴했다.

프랑스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 기병 장교로,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12월 디엔비엔푸 요새의 지휘를 맡았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되어 비행장이 포격으로 부서지고 우기로 보급이 끊기자 요새는 3개 거점만 남았다. 5월 7일 하노이의 코니 장군은 백기를 들지 말고 사격을 멈춘 뒤 장비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카스트리는 요새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 뒤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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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육군에 입대해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했다.
  • 1926기병 장교로 임관했다가 승마 스포츠를 위해 군을 떠났다.
  • 1940–1945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복귀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와 독일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며, 전쟁 말기에는 제3 모로코 스파히 기병대를 지휘했다.
  • 1946인도차이나에 파견되어 모로코 구미에르 대대를 지휘했다.
  • 1953–1954부상으로 프랑스에서 1년간 요양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대령으로 디엔비엔푸 방어를 맡았고, 포위전 막바지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패배했고, 그는 제네바 휴전 협정이 마련되는 동안 4개월간 포로로 억류됐다.
  • 1954–1959귀국 후 서독 주둔 제5기갑사단을 지휘했다. 1959년 교통사고 뒤 군에서 은퇴했다.
  • 1991파리에서 사망했다.

르네 부스케

René Bousquet

점령자와 협상한 비시 경찰 수장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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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홍수 때 구조 활동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음
  • 1931내무부 차관 피에르 카탈라의 보좌관
  • 1933부지사
  • 1939–1942마른현 지사 및 지역 지사
  • 1942–1943비시 경찰 사무총장
  • 1950년대–1993금융·언론계 사업가 및 정치적 영향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