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트의 레죄하저(오늘날 세르비아의 크니차닌)에서 슈바벤 독일계 가정에 태어나 1897년 빈에서 사관생도가 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적군의 제1군단을 지휘하다가 6월 호르티의 국민군으로 넘어갔다. 1936년 정년 퇴역했으나 1938년 복귀해 참모총장이 되었고, 국방장관 버르터 카로이와 함께 독일과의 동맹을 가장 앞장서 주장했다.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침공과 병합을 지휘했고, 1941년 6월 커셔 폭격 뒤 곧바로 소련을 범인으로 지목하며 즉시 선전포고를 건의했다. 1941년 9월 참모총장에서 물러났고, 1945년 2월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으로 끌려가 1952년 그곳에서 숨졌다.
노비사드 학살로 번진 바치카 군사 개입을 명령하고, 뒤에 병력 보존과 서방 접촉을 꾀한 참모총장
모손에서 크나우스(크나우즈) 페렌츠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1934년 어머니의 성인 솜버테이이로 바꾸었다. 1941년 카르파티아 집단을 이끌고 소련 침공에 참가했다. 그해 9월 베르트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에게 바치카 군사 개입을 명령해 이것이 세르비아인 마을들에 대한 징벌 작전과 노비사드 학살로 번졌다. 1943년 학살 책임자들에 대한 조사와 군사재판을 열었고, 칼러이와 함께 서방 연합국과의 접촉을 이끌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해임되었고, 전후 인민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은 뒤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페트로바라딘에서 총살되었다.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 가정에서 프란츠 차이드너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전간기에 성을 헝가리식인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로 바꾸었다. 1941년 8월 세게드에 주둔한 제5군단장이 되었다. 1942년 1월 참모총장 솜버테이이가 그를 바치카의 파르티잔 진압에 보냈고, 그의 명령으로 바치카 마을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노비사드 학살도 그가 조직했다. 1944년 1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다른 유죄 장교들과 빈으로 달아났고, 자원해 친위대에 들어갔다. 화살십자당 정권에서 국방차관이 되어 자신을 비판해 온 버이치질린스키 엔드레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전후 헝가리를 거쳐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11월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