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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스네고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негов

굴라크 생존자로서 탈스탈린화를 밀어붙인 구볼셰비키

미코얀이 소치행을 권했지만, 스네고프는 당원증을 돌려받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버텼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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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가입
  • 1918–1921빈니차·포돌리아 지하 당조직과 포돌리아 губер니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3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31–1937자캅카스·이르쿠츠크·첼랴빈스크·차파옙스크·무르만스크의 당·정치 부문 간부
  • 1937–1954대숙청으로 체포되어 굴라크와 유형지에서 15년 이상 복역
  • 1954–1960석방·복권 후 내무부 굴라크 정치부장
  • 1956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과 희생자 복권을 촉구
  • 1967잠시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곧 복권

알렉세이 마트베예비치 루먄체프

Алексей Матвеевич Румянцев

흐루쇼프의 경제 토론을 연 정치경제학자, 소련 사회학의 제도적 창립자

「모든 사회구성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는데, 사회주의 구성체만은 조직화된 대중행동으로 생겨났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연구소 간부 회의에서 (V.A. 야도프 회고)

흐루쇼프 해빙기의 경제학자. 1962년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실어 경제개혁 논쟁을 촉발했고, 소련 최초 사회학 연구소를 창립했다. 코무니스트·프라우다 주필을 지냈으나 자유주의 성향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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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하리코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5–1943우크라이나 SSR 농업·법무인민위원부 근무 후 하리코프대학·기계제조연구소 정치경제학 교수
  • 1940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지도교수 오스트로비탸노프, 심사 셰필로프
  • 1943–1949하리코프 주 당위원회 서기 — 흐루쇼프의 우크라이나 당 조직에서 활동
  • 1950–1952우크라이나 SSR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사회과학부 책임자
  • 1952–1955중앙위 경제·역사과학부장, 과학·문화부장
  • 1955–1958『콤무니스트』 주필 — 흐루쇼프 해빙기의 당 이론지
  • 1958–1964『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프라하) 주필 — 유럽공산주의 네트워크의 중심지
  • 1962흐루쇼프 후원으로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게재 — 경제개혁 논의 촉발
  • 1964–1965『프라우다』 주필 — 솔제니친 게재 시도 후 해임
  • 1965–1967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학술서기
  • 1967–1971과학아카데미 부원장 겸 ИКСИ 소장 — 소련 사회학의 제도화
  • 1972ИКСИ의 '지나친 자유주의'로 부원장·소장직 사임, 연구소 재편
  • 1971–1993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집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데멘체프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Деменцев

국가재정의 경고자

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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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9치타·캄차카 지역 회계·재정 담당
  • 1944–1947캄차카주 통제·감사기관 감사관
  • 1949–1962고르노알타이·야로슬라블주 재정 책임자, 집행위 부의장
  • 1962–1965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가수입관리국장·차관
  • 1965–1973소련 재무부 차관
  • 1973–1986소련 재무부 제1차관
  • 1986–1987소련 국가은행 이사회 의장

타티야나 이바노브나 자슬랍스카야

Татьяна Ивановна Заславская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의 창시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뇌관

「소비에트 경제학자로서 국가로부터 높은 봉급을 받는 11명의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경제와 사회의 상태에 대해 인민 앞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생각한다」 — 1983년

물리학도에서 경제학으로 전향한 키이우 출신 학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농촌사회를 연구하며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을 개척했고, 1983년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진단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다. KGB가 압수했으나 서방으로 유출되어 『노보시비르스크 선언』으로 불리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토양이 되었다. 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VTsIOM 초대 소장, 인민대의원으로 사하로프·옐친과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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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50모스크바대 물리학과 3년 수료 후 경제학부 우등 졸업
  • 1950–1963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농업 부문 연구, 1956년 кандидат 학위
  • 1963–1987노보시비르스크 IEiOPP, 1967년 사회문제 부서장, 경제사회학 학파 창립
  • 1968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1과학아카데미 정회원(당시 여성 학자 5명 중 한 명)
  • 1983「노보시비르스크 선언」: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사회적 경직을 진단
  • 1986–1991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 1988–1992VTsIOM(전연방 여론연구센터) 창립 소장
  • 1989–1991인민대의원, 사하로프·옐친과 지역간 대의원 그룹에서 활동

레오니트 이바노비치 아발킨

Леонид Иванович Абалкин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수석 경제 이론가,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의 '규제된 시장' 설계자

「우리가 금융 전선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이다」 — 아발킨이 자주 인용한 레닌의 말

모스크바 출신 정치경제학자. 1986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고, 1989년 경제개혁 국가위원장 겸 부총리로 기용되었다. 핵심 구상인 '규제된 시장경제'는 국가 통제 아래 단계적 시장화를 주장했으며,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 제안한 충격요법과 대비되었다. 이 구상은 1990년 5월 최고회의에서 반려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샤탈린의 급진안을 택한 뒤 리시코프 내각이 무너지면서 1991년 초 부총리직을 떠났다. 해체 후 『경제의 제문제』 편집장으로 러시아 사회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옐친식 급진 자유화에 맞서 중국식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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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8칼리닌그라드주 구세프 농업기술학교 교사·교무부원장
  • 1958–1966모스크바 국립경제연구소 대학원 → 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조교·부교수·교수
  • 1966–1976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76–1985CPSU 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84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1기)
  • 1989–1990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겸 소련 부총리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05–12소련 대통령 고문
  • 1991–2005과학아카데미·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2기)
  • 1992–2011『경제의 제문제』(Voprosy Ekonomiki) 편집장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루츠코이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цкой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러시아 유일의 부통령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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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바르나울 고등군사항공학교 졸업
  • 1980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졸업
  • 1985–1988아프가니스탄: 제378독립공격항공연대장, 제40군 공군 부사령관
  • 1988소련영웅 칭호 수여
  • 1990RSFSR 인민대의원, 최고소비에트 위원
  • 1990소련군 참모본부 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91.07–1993.10RSFSR/러시아연방 부통령
  • 1993.09–10의회에 의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 체포
  • 1996–2000쿠르스크 주지사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샤셰노크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Шашенок

원전 시운전과 사고 대응을 맡은 기술자

동료들이 무너진 계측실에서 그를 끌어냈지만, 그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6시 프리피야티 병원에서 숨졌다.

블라디미르 샤셰노크는 원자력발전소의 계측·자동화 설비를 조정하고 시험하던 기술자였다. 체르노빌 4호기 시험에 참여하던 중 폭발로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중화상과 방사선 화상을 입었으며, 동료들에게 구조되어 프리피야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사고 당일 숨진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발전소의 기술 노동이 재난의 최전선에 놓였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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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코노토프 산업기술학교 졸업
  • 1970–1980산업·원자력 설비 분야 기술 업무
  • 1980–1984체르노빌 원전 계측·자동화 조정 및 시험 기술자
  • 1984–1986스몰렌스크아톰에네르고날라드카 소속 조정·시험 기술자
  • 1986체르노빌 4호기 시험 지원 중 사고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