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맺은 독립운동의 철학자-대통령
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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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2–1914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 교수
- 1891–1893오스트리아 제국의회(라이히스라트) 의원 (청년체코당)
- 1907–1914오스트리아 제국의회 의원 (체코 진보당)
-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 (망명)
- 1917–1918러시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편성 지휘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1919년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의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을 지낸 체코인 언론인
님부르크에서 태어난 기계 조립공으로, 189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06년부터 노동자 언론인이자 노동단체 간부로 일했다. 1918년부터 부다페스트에 살며 클라드노의 신문 『스보보다』의 통신원으로 일했고, 1919년 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체코·슬로바키아 분과를 이끌었다. 헝가리 붉은군대가 슬로바키아로 진격한 뒤 프레쇼우에서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하고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이 국가는 7월 7일 체코슬로바키아군이 헝가리군을 밀어내면서 사라졌다. 평의회 공화국 붕괴 뒤 헝가리에서 투옥되었다가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 넘겨졌다. 1922년 소련 시민권을 받고 소련으로 가서 국제노동자구호회 일을 맡았다. 1941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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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사회민주당 입당
- 1906노동자 언론인·노동단체 간부
- 1919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 체코·슬로바키아 분과장
- 1919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 혁명통치평의회 의장
- 1922–1941소련 이주, 국제노동자구호회
사직서 한 장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고트발트의 손을 들어준 마지막 민주 대통령
1948년 2월 25일, 베네시는 공산당 민병대가 프라하 거리를 장악하고 내전이 임박한 가운데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1차 대전 중 마사리크·슈테파니크와 함께 민족평의회를 창설했다. 1918년부터 17년간 외무장관으로서 국제연맹과 소협상을 주도하며 프랑스·소련과의 동맹 체계를 구축했다. 뮌헨 협정으로 사임 후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전후 귀환해 대통령에 복귀했다.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비공산당 장관들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고트발트의 공산당 정부를 승인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비에트 블록 편입을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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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서기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 1921–1922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대통령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노동조합 중앙평의회를 이끌고 1948년 2월 사건 뒤 총리, 1953년 대통령이 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공산당 조직과 노동조합을 구축하고, 1948년 정권 장악 뒤 총리, 고트발트 사후 1953년 대통령이 되어 1957년까지 재임했다.
보헤미아 자콜라니 출신의 석공으로 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독일 점령기에 체포되어 판크라츠 감옥과 드레스덴을 거쳐 1940년부터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해방 뒤 귀국해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의장과 공산당 간부회 위원이 되었고,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을 잠시 지냈다. 1948년 6월 대통령이 된 고트발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1953년 고트발트가 죽자 대통령이 되었다. 보다 온건한 통치를 원했으나 노보트니에게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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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해 당 언론·노동조합·협동조합 조직에 힘썼다.
- 1929–1939공산주의 노동조합 총서기를 지냈다.
- 1945전후 결성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의장이 되었다.
- 1948공산당 정권 장악 뒤 정치서기국 위원과 체코슬로바키아 총리가 되었다.
- 1953–1957고트발트 사후 대통령직을 이어받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1948년 2월 장관 사임을 이끌고 망명해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를 이끈 국민사회당 의장
1948년 2월 공산당의 헌정 질서 변경을 막으려 비공산당 장관들과 사임했다. 쿠데타 뒤 감시를 피해 서방으로 탈출해 망명 정치를 이끌었다.
보헤미아 타보르의 소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937~1939년 프라하 시장을 지냈다. 독일 점령 뒤 체포되어 다하우와 부헨발트에 갇혔다가 1945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전후 국민사회당 의장으로 다시 프라하 시장이 되었고, 1946년 선거에서 제2당을 이끌어 부총리가 되었다. 1947년 9월 마사리크·드르티나와 함께 폭발물 상자를 받았다. 1948년 2월 다른 비공산당 장관들과 함께 사임했고, 쿠데타 뒤 감시를 피해 망명해 1949~1974년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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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1939프라하 시장을 지냈다.
- 1945–1946프라하 시장으로 복귀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사회당 의장이 되었다.
- 1946–1948부총리를 지냈다.
- 1949–1974망명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고트발트 정부에 남아 '합법성'을 부여하고 쿠데타 2주 만에 체르닌 궁전 아래에서 죽은 비공산당 외무장관
1947년 7월 모스크바에서 마셜 플랜 거부를 강요받고 돌아온 마사리크는 '나는 주권국의 장관으로 떠났다가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로, 1925년부터 13년간 주영 공사를 지내고 2차 대전 중 런던 망명정부 외무장관으로 BBC 방송을 통해 점령지 조국과 매주 연결된 상징이 되었다. 1947년 7월 스탈린에게 마셜 플랜 참여 거부를 강요받은 뒤 '나는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토로했으며,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임하지 않고 고트발트 정부의 유일한 비공산당 장관으로 남아 체제 이행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쿠데타 2주 후 체르닌 궁전에서 투신 또는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반세기 넘게 결론이 나지 않은 그의 죽음은 서방에 충격을 주어 마셜 플랜 의회 통과를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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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1922주미 체코슬로바키아 대리공사
- 1922–1925외무장관 보좌관
- 1925–1938주영 체코슬로바키아 전권공사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외무장관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해방 뒤 첫 총리를 지내고 1948년 2월 공산당 편에 서서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친 친소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그해 말 두 당의 합병으로 당을 일당 지배 체제에 편입시켰다.
올로모우츠 출신의 외교관으로 네덜란드·루마니아·미국·스위스·오스트리아 대사를 거쳐 전쟁 중 모스크바 주재 망명정부 대사를 지내며 소련과 가까워졌다. 1945년 4월 코시체 정부의 총리가 되어 1946년 6월까지 민족전선 정부를 이끌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로서 공산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했고, 1948년 2월 비공산당 장관들이 사임할 때 자리를 지키며 공개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쿠데타 뒤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쳤고 공산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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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946코시체 정부와 해방 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총리를 지냈다.
- 1946–1947체코 사회민주당 의장을 지냈다. 1947년 11월 공산당에 지나치게 복종한다는 당내 비판으로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 19482월 쿠데타 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을 주도하고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 1948–1953부총리를 지냈다.
- 1951–1953종교사무 국가국 장관을 지냈다.
- 1953–1964국민의회 의장을 지냈다.
- 1968프라하의 봄 개혁을 지지했으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했다.
전후 대외무역장관을 지내고 1948년 2월 사임 뒤 다시 망명한 국민사회당 정치가
1948년 2월 20일, 경찰 지휘부 교체를 둘러싼 정부 위기에 립카는 비공산당 장관들과 함께 사임서를 제출했다. 베네시 대통령은 사임을 수리했고, 공산당의 권력 장악 뒤 립카는 다시 망명했다.
언론인 출신의 국민사회당 정치가로, 1940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망명정부 외무부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1945년 귀국해 대외무역장관을 맡았고 1946~1948년 제헌의회 의원이었다. 1948년 2월 경찰 숙청에 항의해 사임한 비공산당 장관 가운데 하나였고,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 다시 나라를 떠났다. 망명 중에 체코슬로바키아와 뮌헨 협정, 1948년 2월 사건에 관한 책을 썼고, 1958년 1월 런던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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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영국으로 가 런던 망명정부 외무부 국무장관으로 일했다.
- 1945임시정부의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어 5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다.
- 1946–1948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 19482월 사임 뒤 망명해 체코슬로바키아와 뮌헨 협정, 1948년 2월 사건을 다룬 저술을 남겼다.
1948년 2월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공산당 지도자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바로 모스크바다.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비트는 법을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그 웃음보는 찢어 놓겠다!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모라비아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에 참여했고, 1929년 제5차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어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를 지내며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고, 1945년 5월 프라하로 돌아와 부총리와 민족전선 의장을 맡았다. 1946년 총선에서 KSČ가 38%를 얻은 뒤 총리가 되었고, 1948년 2월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해 6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공산당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며 밀라다 호라코바(1950년 처형), 루돌프 슬란스키와 블라도 클레멘티스(1952년 처형) 등의 재판을 만들었고, 1953년 3월 1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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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참여
- 1929–1945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38–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저항 지도
- 1945–1946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 1946–1948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48–1953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나치와 공산당 모두에 맞서다 1950년 조작된 반역 재판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체코의 여성 정치가
여성 권리 운동가이자 반나치 저항 활동가였던 호라코바는 전후 의원으로 활동하다 1948년 사임했다. 1949년 체포되어 조작된 반역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프라하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여성 권리 운동에 앞장섰다. 독일 점령기 지하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가 1940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테레진과 독일의 감옥을 거쳤고,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전후 국민사회당 의원이 되었고 1947년 여성 잡지 『블라스타』를 창간했다. 1948년 2월 쿠데타 직후 항의의 뜻으로 의원직을 내놓았지만 망명하지 않고 프라하에서 활동을 이어 갔다. 1949년 9월 체포되어 고문을 동반한 신문 끝에 음모·반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6월 27일 판크라츠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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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프라하 시의회 복지부서 책임자가 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사회당에 가입했다.
- 1945독일 점령기 저항 활동으로 수감된 뒤 연합군에 의해 석방되어 프라하로 돌아왔고, 국민사회당에 재가입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 19482월 공산당 장악 뒤 의원직에서 사임했다.
- 19499월 27일 불법 정치 모임과 관련해 체포되었다.
- 1950반역·간첩 혐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6월 27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프라하의 봄 최고 개혁파가 된 사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후 귀국한 스므르콥스키는 동료 지도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국민 앞에 나서 말했다. 브레즈네프가 그의 연설만을 문제 삼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에서 둡체크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나치 점령기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를 이끌었고,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인민민병대를 지휘했으며, 1951년 슬란스키 사건 연루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3년 복권되어 1968년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68년 1월 『루데 프라보』 인터뷰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고, 8월 침공 후 모스크바로 끌려가 의정서 서명을 강요당했으며, 귀환 후 후사크에 의해 축출되어 감시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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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KSČ 입당, 붉은노조 청년서기
- 1944–1945지하 중앙위원,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 주도
- 1946–1948국민의회 의원, 인민민병대 부사령관으로 2월 쿠데타 지원
- 1951–1955슬란스키 사건 연루, 종신형 → 1955년 석방
- 1955–1963JZD 파블로비체 의장으로 복무
- 1963–1967복권, 중앙위원 → 임업·수자원부 장관
- 1968.04–1969.01국민의회 의장, 둡체크의 핵심 개혁 동맹
- 1968.08–1970모스크바 연행, 의정서 서명 → 후사크에 의해 축출·제명
계획과 시장 사이의 '제3의 길'을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경제학자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둡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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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공산당 입당, 대독 저항운동 참가
- 1940–1945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수감
- 1961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 196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68.04–12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겸 경제개혁 조정관
- 1970–1990스위스 장크트갈렌대학교 경제학 교수
- 1990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경제 고문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을 만든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말년에 리흐타는 예측 연구팀을 만들려 했으며, 자신의 말로는 "우리를 정치적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를 공식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과학기술혁명' 개념을 정립하고 60인의 공동연구를 이끌어 『갈림길에 선 문명』(1966)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중앙집권적 계획은 과학기술 시대에 낡은 방식이라 주장하며 프라하의 봄 행동강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가 만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이후 리흐타는 후사크의 '정상화'에 순응하여 철학·사회학 연구소장으로 동료 학자들의 숙청을 주도했고, 1977년에는 헌장 77과 얀 파토치카를 공격하는 언론 캠페인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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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게슈타포 체포, 판크라츠·테레진 수감
- 1945–1953카렐대학교 철학부·자연과학부 수학, PhDr. 취득
- 1949–1954『트보르바』 부편집장, 『루데 프라보』 편집위원
- 1954–1966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66–1968과학기술혁명 학제간 연구팀장, 『갈림길에 선 문명』 출간
- 1967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9–198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사회학 연구소장
- 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끈 후사크의 오른팔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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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베셀리나트루주니치 출생, 부친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공산주의자
- 1945–1948KSČ 입당, 카렐대학교 법학 졸업
- 1959–1961농업·임업·수자원 장관
- 1961–1965내무장관, 국가보안(StB) 관할
- 1968체르니크 내각 부총리 겸 경제위원회 의장
- 1968.11–1970.01KSČ 중앙위 서기·상임위원, 후사크의 '정상화' 노선 합류
- 1970.01–1988.10체코슬로바키아 연방 총리, 18년 재임
- 1988–1990야케시와 충돌 후 사임, 벨벳 혁명 후 KSČ 제명
행동강령 초안을 쥔 이념간부, 침공 뒤에는 정상화의 충복
1968년 초, 아우에르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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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54프라하 정치사회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
- 1956ÚV KSČ 국제문제 담당 컨설턴트
- 1963–1964안토닌 노보트니 제1서기 비서실장
- 1965–1968ÚV KSČ 이념부장, ÚV 후보위원
- 1969–1974ÚV KSČ 국제정치부장, ÚV 정위원
- 1971–1986연방의회 민족원 의원
- 1974–1986『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편집위원회 KSČ 대표
- 1986–1987주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자유의 양립을 시도한 보편적 순간이라고 주장한 체코 소설가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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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50당에서 제명
- 1952–1970FAMU에서 세계문학 강의
- 1956당 복당
- 1967제4차 작가동맹 대회 연설로 프라하의 봄 지적 서막
- 1968.12「체코의 운명」 발표, 하벨과 논쟁
- 1970재제명, 저서 금지
- 1975프랑스로 망명
- 198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출간
- 2019체코 시민권 회복
부조리극으로 체제를 풍자하고 반체제 운동을 이끈 체코 극작가 출신 정치가
1969년 2월, 하벨은 잡지 『트바르시』에 실은 「체코의 운명?」에서 쿤데라의 낙관적 민족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이며, 지리적 위치나 수백 년의 숙명 뒤에 숨는다고 우리가 해방되지는 않는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정치가. 부조리극 『가든 파티』(1963)와 『비망록』(1965)으로 체제를 풍자하며 명성을 얻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후 밀란 쿤데라의 「체코의 운명」에 「체코의 운명?」으로 응답하며 반체제로 전환했다. 1977년 헌장 77을 공동 창립하고 투옥을 거듭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3『가든 파티』로 극작가 데뷔
- 1968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시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으로 저항
- 1969『트바르시』에 「체코의 운명?」 발표, 쿤데라에 반박
- 1977헌장 77 공동 창립, 초대 대변인
- 1979–1983반체제 활동으로 투옥, 『올가에게 보내는 편지』 집필
- 1989시민포럼 이끌며 벨벳 혁명 주도
- 1989–1992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93–2003체코 공화국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