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수오무살미에서 태어난 법학자로, 청년핀란드당의 입헌주의자로서 러시아화에 법적으로 맞섰다. 1905~1907년 메헬린 상원의 통상·산업 담당 의원, 1908~1918년 헬싱키 대학 행정법 교수를 지냈고 1914년 의회 의장이었다. 1917년 헌법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공화국 헌법안을 주도했고, 1918년 승자들의 입헌군주제 구상에 맞서 공화제를 지지했다. 1919년 7월 의회에서 만네르헤임을 143표 대 50표로 누르고 초대 대통령이 되어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강화를 지지했으며, 적색 포로 대부분을 사면하고 타르투 조약을 비준했다. 1925년 재선에 나서지 않았고, 1930년 라푸아 운동 활동가들에게 납치되기도 했다. 1952년 숨졌다.
"요새도, 대포도, 외국의 원조도, 모든 병사 각자가 자신이 조국의 수호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30년간 복무한 스웨덴계 핀란드 귀족으로,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중장까지 올랐다.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총사령관으로 적위대를 진압하고 섭정이 되어 독립을 공고히 했으며, 런던 타임스에 "핀란드의 역사적 사명은 볼셰비즘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소련군에 맞서 싸웠고, 독일과 공동전선을 폈으나 레닌그라드 공격은 거부했다. 1944년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라플란드 전쟁으로 독일군을 축출하여,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점령을 면한 국가로 핀란드를 남겼다.
배이뇌 보이온마는 핀란드의 역사학자이자 교수, 사회민주당 정치가로 독립 초기 공화국의 형성에 관여했다. 그는 노동자 교육기관을 세우고 의회에서 외교와 사회정책을 다루며 학문을 대중적 정치 활동과 결합했다. 1940년 겨울전쟁을 끝낸 모스크바 강화조약 협상에서 핀란드 대표단의 사회민주당계 인사로 서명에 참여했으며, 전쟁과 강대국 사이에서 타협해야 하는 핀란드의 조건을 드러냈다.
퀴외스티 칼리오는 핀란드 농민정당의 지도자로서 토지개혁과 의회정치를 추진한 정치가였다. 그는 네 차례 총리와 여러 차례 의회 의장을 지냈고, 1922년 토지 없는 농민의 정착을 지원한 이른바 칼리오 법을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겨울전쟁을 이끌며 영토 양보에 저항했지만,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조약 서명을 두고 남긴 저주는 그해 여름 오른팔 마비로 현실의 아이러니가 되었고, 건강 악화로 사임한 뒤 같은 해 사망했다.
1873년 중부 포흐얀마의 칸누스에서 태어나 17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광산에서 일하며 급진적 서부광부연맹에 들었다. 1900년 돌아와 1907년 사회민주당 의원이 되었고, 1912~1917년 핀란드 노동조합연맹 의장, 1913년 의회 의장을 지냈다. 1917년 상원 경제부 부의장, 곧 세계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총리가 되었다. 내전 때 인민대표위원회 식량 위원을 맡아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3월 1일 조약에 서명했고, 패전 뒤 러시아로 피했다. 1919~1920년 영국이 꾸린 무르만스크 군단의 정치 고문이 되어 핀란드 공산당에게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22~1949년 미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신문 『라이바야』를 만들었고, 1944년 「토코이 법」으로 내전 관련 혐의를 벗었다.
루돌프 발덴은 핀란드의 제지산업을 키운 기업가이자 군사·국가 조직가였다. 1918년 내전에서 백군의 후방과 보급을 정비한 경험은 만네르헤임과의 긴 협력으로 이어졌고, 겨울전쟁에는 본부 대표로 내각에 참여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장관이 되어 모스크바 강화조약에 핀란드 측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영토를 잃고 독립을 지켜야 했던 국가의 전환을 맡았다. 노동운동에 보수적이었던 그의 태도는 겨울전쟁의 공동방위 속에서 노동조합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겨울전쟁 당시 민간복 차림의 예비병을 가리켜 '모델 카얀데르'라는 말이 돌았다. 총리 재임 중 국방준비 부족의 상징처럼 그의 이름이 붙었으나, 책임이 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핀란드의 산림학자이자 정치가. 1879년 우시카우풍키에서 태어나 시베리아 답사를 거친 식물학 논문으로 1903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11년 헬싱키대학교 산림학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산림청장 대행을 거쳐 1934년 총국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산림행정을 이끌었다. 1922년과 1924년, 1937년에 세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1933년부터 국민진보당 의장을 맡았다. 겨울전쟁 개시 뒤 사임했고 1943년 1월 21일 의사당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03시베리아 답사에 기초한 식물학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1904헬싱키대학교 식물학 도슨트
1911–1934헬싱키대학교 산림학(임업) 교수
1918–1943산림청(메찰리투스) 지휘, 1918년 청장 대행·1927년 상임 청장·1934년 총국장
1922핀란드 총리, 독립 후 첫 관료 내각 수반
1924핀란드 총리, 제2차 내각 수반
1928–1929국방장관
1929–국민진보당 소속 의원(바사·비푸리 서부 선거구)
1933–1943국민진보당 의장, 당내 좌파로 평가됨
1937–1939핀란드 총리, 최초의 사회민주당·농민당 연립(제3차 내각), 겨울전쟁 개시 뒤 사임
협동조합 운동에서 시작해 겨울전쟁 외무장관으로 스탈린과 마주한 핀란드 사민당의 현실주의 지도자
1939년 11월 9일, 핀란드가 축소된 요구를 거부하자 '맞은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탈린이 물었다: '이노마저도 내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핀란드 사회민주당을 1918년 내전의 잿더미에서 의회 민주주의 정당으로 재건한 정치가다. 1926년 핀란드 최초의 좌파 정부 수반이 되었고, 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는 파시키비와 함께 실무 대표로 나서 영토 교환에 응하라고 헬싱키를 설득했다. 1939년 11월 9일 마지막 회담에서 핀란드가 축소된 요구마저 거부하자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훗날 기록한 이도 탄네르였다. 전후 소련의 압력으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으나, 출옥 뒤 의회로 돌아와 1960년대 초까지 당을 이끌었다.
1884년 얘므새의 가난한 농업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러시아 군에 들어갔고, 러일전쟁에 중위로 참전한 뒤 1905년 혁명의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리다 모스크바에서 투옥되고 군에서 쫓겨났다. 핀란드로 돌아와 투르쿠·비푸리·코트카의 노동 신문에서 일하며 사회민주당 당직도 맡았다. 1917년 10월 헬싱키에서 노동자 질서수비대를 조직했고, 11월 총파업 뒤 그 총사령관이 되었다. 1918년 1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술에 빠지고도 볼셰비키에게서 무기와 탄약을 대량으로 사들였으나, 1월 28일 에로 하팔라이넨으로 교체되었다. 탐페레 전투 마지막 밤 포위를 뚫고 나왔지만 라흐티 부근에서 붙잡혀 1918년 5월 헨날라 수용소에서 총살되었다.
1939년 11월 26일 저녁, 그는 몰로토프의 마이닐라 포격 항의각서를 받고 즉시 헬싱키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아르노 위리외코스키넨은 독립 핀란드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외무부의 정치 업무와 대외 협상을 맡았다. 모스크바 공사로서 그는 1939년 11월 마이닐라 포격을 둘러싼 몰로토프의 항의와 핀란드의 회답을 전달하며 전쟁 직전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그는 소련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에도 참여했지만, 협상으로 안보 갈등을 봉합하려던 외교는 겨울전쟁을 막지 못했다.
이 재판은 익살극이다. 실제 기소자는 핀란드 국가가 아니라 한 초강대국의 정부이며, 실제 피고는 핀란드 국민이다.
겨울전쟁 발발 직후 핀란드 총리가 되어 소련이 인정을 거부한 합법 정부를 이끌었고,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협상했다. 핀란드은행 총재 출신의 경제 전문가로 대통령에 올랐으며, 계속전쟁에서 독일과 협력했으나 1944년 뤼티-리벤트로프 협정을 개인 자격으로 맺고 사임해 만네르헤임의 대소 강화를 열었다. 전후 전쟁 책임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오늘날 핀란드에서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1941년 한여름,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사상 최대인 10만 병력의 카렐리야군을 하인리히스에게 맡겨 스비르 강과 오네가 호수 방면 공세를 맡겼다.
에리크 하인리히스는 핀란드의 군인으로, 만네르헤임과 가까이 일하며 전쟁 지휘와 군사참모 업무를 함께 맡았다. 겨울전쟁에서 카렐리야 지협 방어를 지휘한 그는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력을 조율한 뒤 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공세를 이끌었다. 전후에는 무기 은닉 사건의 여파로 군 경력을 마쳤지만, 1948년 모스크바 협상과 만네르헤임 전기 집필에 참여하며 군사 전문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했다.
사단도 채 갖춰지기 전이었다: 실라스부오는 완편되지 않은 제9사단으로 소련 163사단을 연말까지 격파했고, 이어 라테 도로에서 44사단을 포위해 모티 더미로 만들었다.
헬싱키 출신의 예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로 건너가 프로이센 예거대대에서 훈련받고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중대장으로 싸웠다. 겨울전쟁 당시 대령으로 제9사단을 지휘, 수오무살미와 라테 도로에서 소련 제163·제44 사단을 모티 전술로 포위·궤멸시켜 오울루를 향한 소련의 핀란드 분단 계획을 무너뜨렸다. 이 전공으로 소장에 오르고 베스트셀러 『수오무살미 전투』를 썼으나,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계속전쟁과 라플란드 전쟁에서 제3군단장으로 북부 전선과 독일군 축출을 지휘했으며, 1944년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받고 54세로 사망했다.
1941년 6월 25일 저녁 의회에서 "핀란드는 소련의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소련은 핀란드를 상대로 전쟁 행위를 시작했다"고 선언했다.
핀란드은행 간부로 리스토 뤼티의 측근이 된 그는, 뤼티가 1940년 대통령에 오르자 총리로 발탁되었다. 재임 중 핀란드는 독일과 함께 계속전쟁을 치르며 동카렐리야를 점령했고, 경제 문제보다 외교·군사 권한은 만네르헤임과 뤼티, 비팅 외무장관이 쥐고 있었다. 1942년 힘러 방문 때 "우리에게 유대인 문제란 없다"는 말로 핀란드 유대인 논의를 차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6년 전쟁책임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이후 정치에 복귀하지 않고 IOC 위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스탈린의 요구를 허세로 간주하고 만네르헤임의 타협론을 묵살한 겨울전쟁 직전의 핀란드 외무장관
"소련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라": 파시키비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에르코가 남긴 훈시.
헬싱긴 사노마트를 북유럽 최대 일간지로 키운 언론 재벌로, 1938년 12월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소련과의 협상 전권을 장악했다. 모스크바로 떠나는 파시키비에게 "소련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라"고 훈시할 만큼 확신에 찬 강경파였으며, 스탈린의 영토 요구를 허세로 간주하고 만네르헤임 원수의 타협 권고를 묵살했다. 그가 소유한 헬싱긴 사노마트가 여론을 타협 불가 방향으로 이끈 가운데 협상은 결렬되었고, 겨울전쟁 발발 후 파시키비는 이를 "에르코의 전쟁"이라 불렀다.
1944년 휴전 후 힘러가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탈벨라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
핀란드 예거 운동으로 군에 입문한 탈벨라는 겨울전쟁에서 톨바얘르비 전투의 첫 승리를 지휘하며 장군으로 급부상했다. 1940년 가을 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에 파견되어 독일 참모본부와 핀란드군의 비밀 군사 협력을 협상했고, 이는 계속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전후 사업가와 헬싱키 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자로서 1966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