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요구한 저술가
노예제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고,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으로 여성의 투표권과 법적 평등을 요구했다. 1793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마리 구즈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정치 저술가다. 노예제를 비판하고,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여성의 법적 평등과 공적 발언·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이 선언은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 아니라 기존 권리 선언의 배제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혁명기의 폭력과 산악파의 권력에 반대하는 글을 썼으며, 1793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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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5몽토방의 요리업자 루이이브 오브리와 강제로 혼인했다
- 1766아들 피에르 오브리가 태어났고 남편이 곧 죽은 뒤 올랭프 드 구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 1770파리에 정착해 교양을 넓히고 문학 살롱에 드나들었다
- 1784자전적 소설 「발몽 부인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 1785노예제를 비판한 희곡 「자모르와 미르자」가 코메디 프랑세즈 레퍼토리에 올랐으나 공연되지 않았다
- 1788「민중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하고 표현의 자유, 이혼, 성평등, 노예제와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
- 1789포스터와 팸플릿으로 혁명 논쟁에 개입했다
- 1791「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담은 「여성의 권리」를 출간했으나 입법의회는 심의를 거부했다
- 1792왕정 붕괴 후 온건한 지롱드파에 합류해 공포정치에 반대하고 로베스피에르를 비판했다
- 1793반혁명적 글로 7월에 투옥됐고 11월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혁명의 신고전주의 화가
1793년 7월 13일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된 친구 장폴 마라를 그린 《마라의 죽음》은 혁명의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이 그림은 오랫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발견되었다.
1748년 파리에서 태어나 1825년 브뤼셀에서 사망한 프랑스 화가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1780년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로 명성을 얻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적극적 지지자이자 자코뱅 클럽 성원으로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다. 국민공회 의원으로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일반 치안위원회 위원으로 공포정치에 관여했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1794~1795년 두 차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804년 제정 선포 후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그렸다.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브뤼셀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지로데·제라르·그로·앵그르 등을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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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4《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로 명성을 얻음
- 1789–1794혁명 지지, 국민공회 의원, 일반 치안위원회 위원
- 1794–1795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두 차례 투옥
- 1804나폴레옹의 궁정 화가
- 1815–1825브뤼셀에서 망명 생활, 그곳에서 사망
파리 코뮌 의원으로 피의 주간 뒤 숨어서 「인터내셔널가」의 가사를 쓴 직물 도안공·시인
1871년 6월 파리 코뮌이 진압된 뒤, 파리 은신 중에 「인터내셔널가」의 가사를 썼다. 미국 망명 중 추방된 코뮌원들과의 연대를 조직했다.
파리의 포장공 가정에서 태어나 직물 도안공으로 일하며 1830년대부터 노래와 시를 썼고, 1848년 6월 봉기에 가담했다. 도안공 조합을 세우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1871년 4월 2구 보궐선거로 코뮌 의원이 되었고, 피의 주간 뒤인 6월 숨어 지내며 「인터내셔널가」를 썼다. 궐석 사형 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887년 가난 속에 숨졌고, 이듬해 피에르 드제이테르가 곡을 붙인 「인터내셔널가」는 세계 노동운동의 노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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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0첫 노래 「자유 만세」를 지었다.
- 18481848년 혁명에 참여했다.
- 1864직물 도안공 조합의 창설을 주도했고, 조합은 이후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 1871파리 코뮌 의원으로 선출되어 공공서비스위원회에서 일했고, 피의 주간 전투에도 참여했다.
- 1880사면 뒤 프랑스로 돌아왔다.
- 1887「인터내셔널가」 가사가 처음 실린 『혁명가요집』이 출간되었다.
코뮌의 예술가 연맹을 이끌고 방돔 원주 철거의 책임을 지고 스위스로 망명한 사실주의 화가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예술가 연맹 의장과 의원을 맡아 박물관 개방을 추진했다. 코뮌 패배 뒤 방돔 원주 파괴 책임으로 6개월 수감됐고, 재건 비용 판결 후 스위스로 망명했다.
쥐라 지방 오르낭의 부농 가정에서 태어나 「오르낭의 매장」과 「돌 깨는 사람들」로 사실주의를 열었고, 프루동과 가까웠다. 1870년 레지옹 도뇌르를 거절했다. 1871년 코뮌의 예술가 연맹 의장으로 미술관의 자치와 검열 폐지를 요구했고, 6구 보궐선거에서 코뮌 의원이 되어 코뮌 공안위원회에 반대한 소수파에 섰다. 방돔 원주를 옮기자고 제안한 일 때문에 피의 주간 뒤 6개월 금고를 선고받았고, 1873년 원주 재건 비용을 물라는 판결이 나자 스위스로 망명해 라투르드페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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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9–1851「돌 깨는 사람들」과 「오르낭의 매장」 등 일상 장면을 대형 화폭의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 파리 살롱의 관습에 도전했다.
- 1870정부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 1871파리 코뮌에서 예술가 연맹 의장을 맡고 박물관 개방과 전시회 조직을 추진했으며, 의원으로 활동했다.
- 1873방돔 원주 재건 비용 32만 3천 프랑을 부담하라는 판결 뒤 스위스로 떠나 라투르드페이에 정착했다.
악시옹 프랑세즈의 목소리, 추문을 날마다 지면에서 거리로 밀어 올린 논객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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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7–1890파리 출생,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의학 수학
- 1900–1908왕당파로 전향, 악시옹 프랑세즈 합류
- 1908–1942《악시옹 프랑세즈》 공동 창간자이자 주필
- 1919–1924파리 선출 하원의원
- 1923–1927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둘러싼 소송, 명예훼손 유죄로 벨기에 망명
- 1930사면으로 귀국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로 2월 6일 시위를 조성
- 1942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사망
네그리튀드 공동 창시자, 식민주의 비판의 선구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이 나치즘으로 규정한 방법을 이미 식민지 민족에게 써 왔으며 나치즘은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문명의 자연적 귀결이라고 논했다.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에서 세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운동을 열었다. 잡지 L'Étudiant noir는 1934~1935년에 창간되었고, 1935년 5~6월호에서 '네그리튀드'가 처음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프란츠 파농을 가르쳤다. 1945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당선돼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 47년간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6년 마르티니크를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만든 법을 통과시켰다. 1956년 10월 24일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흐루쇼프 보고와 마그레브 탄압을 들어 공산당과 결별했으며, 영어권 서술은 헝가리 혁명 탄압을 탈당 사유로 든다.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하고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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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파리에서 L'Étudiant noir 창간, '네그리튀드' 개념 최초 제시
- 1939『고향으로의 귀환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출간
- 1941수잔 루시와 함께 Tropiques 창간
- 1945프랑스 공산당 소속 국민의회 의원 및 포르드프랑스 시장 당선
- 1946마르티니크의 프랑스 데파르트망 편입 법안 주도
- 1950『식민주의 담론』(Discours sur le colonialisme) 출간
- 1956헝가리 봉기 탄압에 항의,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로 PCF 탈퇴
- 1958마르티니크 진보당(PPM) 창당
- 1983–1988마르티니크 지역의회 의장
- 199347년간의 국민의회 의원직 은퇴
- 200156년간의 포르드프랑스 시장직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