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
국가·세력
정치적 입장
국적(선택됨)
출신 배경
시대(선택됨)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14개조와 국제연맹을 내걸었으나 상원 비준을 얻지 못한 미국 대통령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과 뉴저지 주지사를 거쳐 1912년 대통령이 되었고, 취임 첫해 연방 관료 조직에 인종 분리를 들여왔다. 1917년 4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이유로 참전을 요청했고, 1918년 1월 14개조로 국제연맹과 민족자결의 구상을 내놓았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연맹 규약 기초를 이끌었지만 연맹을 위해 독일에 대한 여러 요구를 양보했다. 1919년 10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타협을 거부해 상원의 조약 비준이 무산되었다. 같은 시기 파머 습격의 「적색 공포」가 벌어졌다. 191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1924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2–1910프린스턴 대학교 총장
  • 1911–1913뉴저지 주지사
  • 1913–1921미국 대통령
  • 191814개조 발표
  • 1919파리 강화회의, 국제연맹 규약 기초 위원회 의장

휴 쿠퍼

Hugh Lincoln Cooper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65–1937 ○ 자연사

세계 최대 댐 기술을 사회주의 건설 현장에 옮긴 미국인 공병 대령

1932년 드네프로스트로이 준공식에서: "이렇게 얻은 미국식 기술 경험이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무학으로 댐 공학을 익힌 휴 링컨 쿠퍼는 나이아가라 급류(1907)와 미시시피 키오콕 댐(1913)을 성공시키며 자력으로 미국 최고의 수력 기술자가 되었다. 1926년 소련의 초청으로 드네프로스트로이 건설 수석 컨설턴트를 맡아 GE 터빈을 공급하고 공정을 총지휘, 1932년 유럽 최대 발전소를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완공했다. 같은 해 소련은 쿠퍼와 미국인 기술자 5명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평생 반공주의자로 남았으나, 그의 댐이 없었다면 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성취도 없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토론토 발전소(나이아가라 호스슈 급류) 완공
  • 1913미시시피강 키오콕 댐 및 발전소 완공
  • 1914아스완 댐 전력화 사업 컨설턴트(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
  • 1917–1918미 육군 공병대 감독 공병 장교, 대령
  • 1919레이크 줌브로 수력발전소(미네소타) 완공
  • 1924윌슨 댐(앨라배마, 후일 TVA 편입) 완공
  • 1927–1932드네프로스트로이(드네프로게스) 수석 컨설턴트, 소련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외국인 최초)

윌리엄 S. 그레이브스

William Sidney Graves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65–1940 ○ 자연사

1918~1920년 미국 시베리아 원정군을 이끌며 러시아 내전에 엄격한 중립을 지킨 장군

1865년 텍사스에서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9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고, 필리핀-미국 전쟁에 참전한 뒤 육군 참모본부에서 일했다. 1918년 윌슨 대통령의 직접 명령으로 미국 시베리아 원정군을 맡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는 명령에 따라 철도 운행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철수에 집중했고, 콜차크 쪽을 도우라는 압력을 거부했다. 세묘노프와 칼미코프 병사들의 살인과 약탈, 일본의 동시베리아 병합 의도를 비판했다. 마지막 미군은 1920년 4월 1일 떠났다. 1928년 퇴역해 회고록 『미국의 시베리아 모험』을 냈고, 1940년 뉴저지에서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889웨스트포인트 졸업
  • 1899–1902필리핀-미국 전쟁 참전
  • 1909워싱턴 육군 참모본부 근무
  • 1918준장 진급, 제8사단장
  • 1918–1920미국 시베리아 원정군 사령관
  • 1928퇴역

버논 켈로그

Vernon Lyman Kellogg
미국 미국인 1867–1937 ○ 자연사

과학과 국제구호를 잇고 성인 급식을 확장한 조사관

“부모가 죽도록 내버려 두면서 아이들만 먹이는 것으로 그칠 수 있는가?”

버논 켈로그는 곤충학자이자 과학 행정가로, 스탠퍼드에서 동물학과 곤충 분류를 연구하고 미국 과학 연구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허버트 후버의 벨기에 구호 활동을 도운 인연은 그를 전후 국제구호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1921년 볼가 유역을 직접 시찰한 그는 아동만이 아니라 부모와 성인도 구호해야 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했고, 이는 미국구호행정의 사업 확대를 뒷받침했다. 그의 경력은 전문 과학자가 기근 앞에서 행정과 윤리적 판단의 주체가 된 사례를 보여 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867–1894캔자스에서 성장하고 캔자스대학교·스탠퍼드대학교·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생물학과 곤충학을 공부했다.
  • 1894–1920스탠퍼드대학교 동물학 교수로 재직하며 동물학과를 세우고 곤충 분류와 진화를 연구했다.
  • 1915–1916벨기에 미국구호위원회 책임자로 전쟁 난민과 민간인 구호를 조직했다.
  • 1917–1920구호와 전쟁 경험을 저술하고 후버의 식량·국제구호 활동을 지원했다.
  • 1921.09미국구호행정 특수 조사관으로 첫 구호 열차를 타고 볼가 유역을 조사했다.
  • 1921년 말워싱턴에서 후버에게 성인까지 포함하는 구호 확대의 필요성을 보고했다.
  • 1921–1933국가연구위원회 초대 상임 서기로 일하고 과학연구 제도와 대중 과학을 조직했다.

W. E. B. 듀보이스

W. E. B. Du Bois
미국 공산당 공산주의 미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1868–1963 ○ 자연사

「자본주의는 스스로 개혁할 수 없다」: 93세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흑인 해방운동의 아버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 싶다.」 —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 신청서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역사가, 범아프리카주의자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이다. NAACP 공동 창립자로서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를 24년간 편집하며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을 이끌었고, 『흑인의 영혼』과 『미국의 흑인 재건』을 통해 미국 사회학과 역사학의 지형을 바꾸었다. 자본주의를 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다.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콰메 은크루마의 초청으로 가나에 정착해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에 착수하던 중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5–1897윌버포스대·펜실베이니아대 연구원, 『필라델피아 니그로』(1899) 출간
  • 1897–1910애틀랜타대 교수, 『흑인의 영혼』(1903) 출간, 나이아가라 운동 창립(1905)
  • 1910–1934NAACP 공동 창립,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 편집장;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 1934–1944애틀랜타대 교수, 『미국의 흑인 재건』(1935) 출간
  • 1944–1948NAACP 특별연구국장; 유엔 창설 회의 참석
  • 1950–1951평화정보센터 의장;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기소, 무죄
  • 1961–1963미국 공산당 입당; 가나로 이주,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 착수

코델 헐

Cordell Hull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71–1955 ○ 자연사

자유무역과 국제기구를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41년 11월 26일, 그는 일본 대사에게 「미일 간 합의의 기초로 제안된 개요」를 전달했다.

코델 헐은 미국의 자유무역과 다자적 국제질서를 설계한 민주당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다. 그는 1930년대 무역장벽 완화와 선린정책을 추진했지만,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자주 긴장했다. 1941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를 정리한 11월 26일 합의안 개요를 전달했으며, 이는 전쟁 직전 외교의 마지막 문서가 되었다. 전후에는 국제연합 창설을 이끈 공로로 194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93–1897테네시주 하원의원
  • 1907–192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21–1924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
  • 1923–193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31–1933테네시주 연방 상원의원
  • 1933–1944미국 국무장관
  • 1945국제연합 샌프란시스코 회의 대표

허버트 C. 후버

Herbert Hoover

기근 구제의 거장이자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이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든, 먹여야 한다!」 볼셰비키 구제를 두고 공격받자 후버가 남긴 응답이었다.

후버는 광산기사로 막대한 부를 이룬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의 구호활동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로, 1929년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구제위원회와 미국 식량청을 이끌며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고, 전후 미국구제청(ARA)을 사적 조직으로 개편해 동유럽과 러시아 구제를 주도했다. 1921년 볼가 기근에 맞서 고리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고 리가 협정을 직접 주도해 식량 분배의 자율성과 소련의 금 보유분 지출을 관철, 하루 천만 명 이상을 먹였다. 대공황 속 대통령직에서는 고전했으나 은퇴 후에도 트루먼·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개혁위원회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상세 이력 보기
  • 1874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의 퀘이커 가정에서 출생
  • 1895스탠퍼드대 졸업, 광산기사로 중국·호주 등에서 부 축적
  • 1914–1919벨기에 구제위원회(CRB) 위원장, 점령지 벨기에에 식량 지원
  • 1917–1919미국 식량청장, '식량 독재자'로 전시 식량 통제
  • 1919–1923미국구제청(ARA) 국장, 동유럽·러시아 구제 주도
  • 1921.08.20리가 협정 조인, 볼가 기근 구제의 자율성·비용 조건 확정
  • 1921–1928상무장관
  • 1929–1933제31대 대통령, 대공황 속 재선 실패

윌리엄 D. 리히

William D. Leahy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75–1959 ○ 자연사

얄타 합의의 치명적 모호함을 루스벨트에게 직고한 원수급 비서실장

리히가 루스벨트에게 말했다. '이 합의는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 루스벨트가 답했다.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윌리엄 리히는 미 해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와 트루먼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사실상의 첫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해군작전부장과 푸에르토리코 총독, 비시 프랑스 대사를 지낸 뒤 1942년 현역으로 복귀해 전쟁 내내 연합국 전략을 조율했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그는 폴란드 합의문을 읽고 루스벨트에게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루스벨트는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라고 답했다. 원자폭탄 투하를 훗날 비판했지만 당시 공개 반대는 하지 않았고, 전후에는 핵 선제사용 전쟁계획을 거부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5아이오와주 햄프턴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아들로 출생
  • 1897해군사관학교 졸업, USS 오리건에서 스페인-미국 전쟁 참전
  • 1927–1931해군 병기국장, 동기생 중 첫 제독 진급
  • 1937–1939해군작전부장, 함대 확장과 전쟁 준비 주도
  • 1939–1940푸에르토리코 총독, 기지 건설과 뉴딜 공공사업 집행
  • 1940–1942비시 프랑스 주재 대사, 페탱 정권의 대독 협력 억제 실패
  • 1942–1949대통령 비서실장 겸 합동참모의장, 얄타·포츠담 회담 배석
  • 1950회고록 『나는 거기에 있었다』 출간

윌리엄 N. 해스켈

William N. Haskell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78–1952 ○ 자연사

기근 한복판의 국제 구호 지휘관

1921년 10월 모스크바의 해스켈은 후버에게, 굶주림이 겨울에 절정에 이르러 1,600만 명을 덮칠 것이라고 타전했다.

윌리엄 N. 해스켈은 미 육군 장교로서 전후 국제 구호 행정과 군사 지휘를 결합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후버의 임명으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소련 러시아에서 미국구호행정의 작전을 이끌며, 기근 속 식량·의료품의 대규모 배급을 조직했다. 그의 임무는 볼셰비키 관료의 통제와 협조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구호의 속도와 행정적 책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후 뉴욕 주방위군과 미국 민방위 조직을 지휘하며 군과 국가 행정에서 긴 경력을 이어 갔다.

상세 이력 보기
  • 1901미 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05육군참모대학 졸업
  • 1906–1907필리핀에서 미군 작전 복무
  • 1916–1917뉴욕 주방위군 제69보병연대 임시 대령
  • 1918–1919미 원정군 포병 복무, 임시 대령 및 공로훈장 수훈
  • 1919–1921ARA 아르메니아 사절단장
  • 1921–1923ARA 소련 러시아 지부장, 러시아 기근 구호 지휘
  • 1926–1940뉴욕 주방위군 사령관, 소장
  • 1944–1945미국 민방위국장

월터 라이먼 브라운

Walter Lyman Brown
미국구호청 미국인 미국계 1880–1955

구호를 외교 협상으로 바꾼 실무자

1921년 8월 20일 리가 합의문에 미국구호행정의 유럽 담당 이사로 서명했다.

월터 라이먼 브라운은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구호 행정을 이끈 실무 외교가로, 허버트 후버의 미국구호행정에서 유럽 업무를 맡았다. 1921년 러시아 기근이 심화되자 그는 리가에서 막심 리트비노프와 협상해 미국구호행정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기아 지역에 들어갈 조건을 마련했다. 이 합의는 인도주의적 구호를 표방했지만 미국의 반볼셰비즘과 소비에트 정부의 통제·주권이 맞물린 절충이기도 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1921미국구호행정 유럽 업무 담당
  • 1921.08리가 협정 미국 측 서명자
  • 1921–1923러시아 구호 작전 유럽 조정
  • 1921.12리가 이행 협정 미국 측 서명
  • 1923미국구호행정 러시아 사업 종료 과정 참여

조지 C. 캐틀릿 마셜

George C. Marshall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59 ○ 자연사

유럽 부흥을 설계하고 미군을 40배로 키운, 육군·국무·국방 3직을 모두 지낸 유일한 미국인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마셜은 1947년 6월 5일, 준비된 원고도 없이 1,200단어의 연설을 통해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에 반대하는' 유럽 원조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마셜은 육군참모총장(1939~45)·국무장관(1947~49)·국방장관(1950~51)을 두루 지낸 유일한 미국인으로, 처칠이 '승리의 조직자'라 부른 연합군 팽창의 총설계자였다.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전후 유럽의 경제 붕괴와 소련 팽창에 맞선 대규모 원조 구상을 제안했고, 이 '마셜 플랜'은 4년간 130억 달러로 서유럽 산업 기반과 통화를 안정시키며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틀을 재편했다. 국무장관 시절 이스라엘 승인을 두고 트루먼과 정면 충돌했으며, 국방장관으로 복귀해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함으로써 민간의 군대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인 출신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80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석탄·코크스 사업가의 막내로 출생
  • 1902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육군 소위 임관 후 필리핀 배치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 기획
  • 1939–1945육군참모총장, 미군을 18만9천에서 800만으로 팽창시키고 연합군 전략 총괄
  • 1945.12–1947.01중국 특사, 국민당-공산당 연립정부 중재 실패
  • 1947–1949국무장관, 마셜 플랜 제안 및 NATO 창설 추진
  • 1950–1951국방장관,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 및 군부 재건
  • 1953노벨평화상 수상

헨리 뵈우커스

Henry Beeuwkes
미국 미국계 1880–1959 ○ 자연사

기근 현장에서 의료 구호를 조직한 의사

뵈우커스는 기근 구호를 급식소의 수가 아니라 병원과 위생망의 회복으로 기록했다.

헨리 뵈우커스는 미국의 의사이자 공중보건 행정가로, 국제 구호를 임상과 위생의 조직 문제로 다룬 인물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미국구호행정의 러시아 의료국장으로 일하며 식량 배급과 병행되는 병원 지원, 의약품 공급, 예방접종과 전염병 대응을 조정했다. 그는 이 경험을 1926년 저서에 정리해 기근 구호가 급식소를 넘어 의료·위생 체계의 복구였음을 기록했다. 이후 황열병 연구와 군 의료 행정에도 참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9미 육군 의무대 입대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에서 군의관 복무
  • 1921–1923미국구호행정 러시아 의료국장
  • 1925–1927록펠러재단 서아프리카 황열병 조사단장
  • 1926『러시아 기근의 미국 의료·위생 구호』 출간
  • 1942–1945밸리포지 종합병원 지휘관

윌리엄 Z. 제불론 포스터

William Zebulon Foster
미국 공산당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81–1961 ○ 자연사

1919년 대철강파업 지도자에서 미국 공산당의 최장기 지도자로

“노동자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정당은 혁명적 정당뿐이다.” — 『노동자 생활의 페이지들』(1939)

1919년 대철강파업을 지휘한 노동운동 전략가에서 CPUSA 최장기 지도자로 전환했다. 1944년 브라우더의 당 해산에 맞서 당을 재건했고, 『미국 공산당사』 등 마르크스주의 역사서를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01미국 사회당 입당
  • 1909IWW 가입, 스포케인 언론자유 투쟁 참가
  • 1912북미신디칼리스트연맹(SLNA) 창립
  • 1917–1918시카고 도축산업 노동자 조직화 — 8시간 노동제 중재
  • 1919대철강파업 지휘 — 25만 노동자 동원
  • 1920노동조합교육연맹(TUEL) 창립
  • 1921코민테른 제3차 대회 참석 후 공산당 입당
  • 1924첫 대선 출마 — 공산당 후보
  • 1929CPUSA 의장 취임, TUUL 창설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44–1945브라우더 당 해산 반대 — CPUSA 재건, 서기장
  • 1948스미스법 기소 — 건강 악화로 재판 연기
  • 1957CPUSA 명예의장 은퇴
  • 1961모스크바 사망 — 붉은광장 국장

대공황과 세계대전의 미국, 얄타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짠 4선 대통령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 연설에 앉아서 임했다. 걸을 수 없는 대통령이 평생 숨겨온 장애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뉴딜로 연방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국을 이끌며 독일 우선 전략을 관철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외교력을 집중했고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에 신뢰를 걸었으나, 이미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얄타 합의는 유엔을 낳고도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비판 속에 냉전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섰다.

상세 이력 보기
  • 1882뉴욕주 하이드파크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출생
  • 1913–1920해군 차관보,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 확장 주도
  • 1921소아마비 진단, 하반신 영구 마비
  • 1929–1932뉴욕 주지사, 대공황 대응 실업구제 정책 선도
  • 1933–1945제32대 대통령, 뉴딜·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3.11테헤란 회담, 스탈린과 첫 대면
  • 1945.02.04–11얄타 회담, 소련의 대일 참전·유엔 안보리 틀 합의
  • 1945.04.12그루지야주 웜스프링스에서 뇌출혈로 사망

조지 S. 패튼

George Smith Patton J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885–1945 ○ 자연사

기동전과 기만작전의 공격적 지휘관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 패튼은 실재하지 않는 제1미군집단의 얼굴이 되어 칼레를 향한 위협을 연출했다.

조지 S. 패튼은 기갑부대의 기동성과 공격적 작전 운용을 중시한 미국 육군 장군이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 전투 지휘 능력을 보였지만, 병사 폭행과 거친 발언으로 지휘권과 명성에 반복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는 허구의 제1미군집단을 지휘하는 인물로 내세워 독일군이 칼레 방면의 상륙을 믿도록 만들었고, 실제 노르망디 상륙 뒤에도 독일 예비전력을 묶어 두는 데 기여했다. 이후 제3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했으나, 전후에는 반소련 발언과 탈나치화 비판으로 바이에른 군정에서 해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9미국 육군 기병 소위
  • 1916판초 비야 원정 참전, 퍼싱 장군 부관
  • 1917–1918프랑스 전차학교 창설·지휘, 제304전차여단 지휘
  • 1942횃불 작전 서부기동부대 지휘, 북아프리카 상륙
  • 1943미 제7군 사령관, 시칠리아 전역 지휘
  • 1944포티튜드 사우스 허구 제1미군집단 사령관
  • 1944–1945미 제3군 사령관, 프랑스·독일 진격
  • 1945바이에른 군정관, 제15군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Chester William Nimitz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885–1966 ○ 자연사

정보와 기동으로 태평양 함대를 재편한 제독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의 공격 목표를 확신한 뒤 가용 전력을 방어에 집중했다.

체스터 W. 니미츠는 미국 해군의 잠수함·군수 전문가에서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해상 지휘관으로 올라선 제독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직후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그는 일본군 통신정보를 작전 판단에 결합해 미드웨이에 가용 전력을 집중했고, 과달카날 공세를 승인하며 반격의 지휘 체계를 세웠다. 그의 지휘는 압도적 물자와 정보 우위를 작전 기동으로 전환했지만, 섬 전투와 봉쇄가 낳은 막대한 희생이라는 전쟁의 대가를 지우지는 못했다. 전후에는 해군참모총장으로 감군과 핵추진 잠수함 건설을 함께 추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미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로 임관
  • 1917–1918대서양 잠수함군 참모장
  • 1939–1941해군 항해국장
  • 1941–1945미 태평양함대 및 태평양 전구 연합군 총사령관
  • 1942미드웨이 방어 전력 배치와 과달카날 반격 지휘 체계 승인
  • 1944미 해군 최고 계급인 함대원수에 임명
  • 1945–1947미 해군참모총장
  • 1947–1966함대원수로 현역 신분 유지, 해군 자문과 전후 미일 화해 활동

애나 루이즈 스트롱

Anna Louise Strong
미국 공산당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85–1970 ○ 자연사

러시아·중국 혁명을 50년간 현장에서 기록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모스크바 뉴스』 창간자

「우리는 이 나라 노동이 시도한 가장 거대한 행동에 착수하고 있다 —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직전 사설

미국 네브래스카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공산주의자. 시카고대 철학 박사 후 시애틀 총파업(1919)을 취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1930년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를 창간했다. 1946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해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기록했고, 1949년 소련에서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1955년 명예 회복 후 중국에 정착했다. 이후 '외국인 친구'로서 문화대혁명기까지 마오의 중국을 취재하며 30권 이상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서방에 전한 독보적 증언자다.

상세 이력 보기
  • 1885네브래스카주 프렌드에서 진보적 목사 가정의 딸로 출생
  • 1908시카고대 철학 박사 — 「기도의 사회심리학」으로 학위 취득
  • 1916–1918시애틀 교육위원 선출 — IWW 지지·반전 활동으로 리콜
  • 1919『시애틀 유니언 레코드』 편집자 — 시애틀 총파업을 현장 취재
  • 1921AFSC 구호단원으로 소련행 — 볼가 기근 구호 참여 후 모스크바 특파원 정착
  • 1930소련 최초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 창간·편집장
  • 1931소련 농업경제학자 조엘 슈빈과 결혼 (1942년 사별)
  • 1937–1938스페인 내전·중국 항일 근거지 종군 취재
  • 1946옌안에서 마오쩌둥 인터뷰 —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 발언 기록
  • 1949소련 당국에 체포, 「미국 간첩」 혐의로 추방 — 1955년 명예 회복
  • 1958–1970중국 영구 정착 — 마오·저우언라이와 교류하며 '외국인 친구'로 활동
  • 19703월 29일 베이징에서 심장마비 사망 — 저우언라이·궈모뤄 문상

프랭크 잭 플레처

Frank Jack Fletche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885–1973 ○ 자연사

항공모함 시대의 작전 지휘관

그는 산호해에서 포트모르즈비 침공 함대를 물러나게 했다.

프랭크 잭 플레처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한 미국 해군 제독이다. 그는 산호해에서 일본의 포트모르즈비 진격을 저지하고, 미드웨이에서는 전술 지휘관으로 일본 항공모함 네 척의 격침에 관여했다. 그의 신중한 항공모함 운용은 전력을 보존했지만, 과달카날에서 함대 철수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02–1906미 해군사관학교 생도
  • 1914베라크루스 작전 참가, 명예훈장 수훈
  • 1918–1919구축함 벤험·그리들리 함장
  • 1933–1936해군장관 보좌관
  • 1939–1941순양함 사단 지휘관, 소장
  • 1942.01–05제17기동부대 지휘관, 산호해 해전
  • 1942.06미드웨이 해전 전술 지휘관
  • 1942–1945알래스카 해역 미 해군 지휘관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Raymond Ames Spruance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86–1969 ○ 자연사

미드웨이의 냉정한 항공전 지휘관

깊은 위기에서도 침착하고 결단력 있었으며, 모든 기회를 과감히 붙잡았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한 제독이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거느린 제16기동부대를 지휘해 일본의 항공모함 네 척을 격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신중한 판단과 침착한 지휘로 명성을 얻었으며, 전후에는 해군대학 총장과 필리핀 주재 대사를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
  • 1913–1922구축함 지휘 및 태평양 함대 복무
  • 1935–1938해군대학 교관
  • 1938–1939전함 미시시피 함장
  • 1942제16기동부대 지휘, 미드웨이 해전
  • 1943–1945중부 태평양군 및 제5함대 사령관
  • 1946–1948해군대학 총장
  • 1952–1955필리핀 주재 미국 대사

존 리드

John Reed
독립 활동 공산주의 미국 미국 1887–1920 ○ 발진티푸스

볼셰비키 혁명의 목격자에서 미국 공산당 창립자로: 크렘린 성벽에 묻힌 미국인

붉은광장 혁명 희생자 합동 장례식. 리드는 깨달았다. 경건한 러시아 민중은 더 이상 사제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지상에 어떤 천국보다 찬란한 왕국을 짓고 있었다.

미국 언론인이자 공산주의자. 1917년 10월 혁명을 목격하고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썼다. 미국 공산노동당을 공동 창립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이 되었다. 크렘린 벽에 안장된 극소수 미국인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10하버드대 졸업, 뉴욕에서 저널리즘 경력 시작
  • 1913『더 매시스』 기자 합류, 패터슨 파업 취재 중 첫 체포
  • 1913–1914멕시코 혁명 종군기자 — 판초 비야 군대와 4개월 동행, 『반란의 멕시코』 출간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혁명 직접 목격, 볼셰비키 정부 외무인민위원부에서 활동
  • 1919『세계를 뒤흔든 10일』 출간, 미국 공산노동당(CLP) 공동 창립
  • 1919–1920코민테른 집행위원, 제2차 코민테른 대회 미국 대표, 바쿠 동방민족대회 참석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Alexander Vandegrift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네덜란드인 1887–1973 ○ 자연사

과달카날을 지키고 해병대를 지킨 장군

1946년 상원에서 그는 해병대의 미래를 의회가 결정해야 한다며, “무릎 꿇는 것은 우리 군단의 전통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는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상륙작전과 방어를 결합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2년 8월 제1해병사단을 이끌고 과달카날에 상륙해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지켰고, 이 공세는 미국의 첫 대규모 지상 반격이 되었다. 전후에는 해병대 사령관으로서 육군 편입론에 맞서 해병대의 독자적 역할을 의회에 호소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9미국 해병대 소위로 임관
  • 1912–1914쿠바·니카라과·멕시코 원정 복무
  • 1915–1923아이티 점령 및 헌병대에서 복무
  • 1942제1해병사단장, 과달카날 상륙과 방어 지휘
  • 1943제1해병상륙군단장, 부건빌 상륙 지휘
  • 1944–1947제18대 미국 해병대 사령관
  • 1945현역 해병 최초로 대장 진급
  • 1964회고록 《Once a Marine》 출간

해리 홉킨스

Harry Hopkins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90–1946 ○ 자연사

뉴딜의 행정가이자 전시 외교의 실무자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대일전 준비 시점을 물었고, 스탈린은 8월 8일을 제시했다.

해리 홉킨스는 대공황기 미국의 공공구호를 유급 일자리 정책으로 조직한 행정가이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가장 가까운 참모였다. 그는 연방구호와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운영한 뒤 상무장관을 지냈고, 전쟁기에는 무기대여법과 연합국 협력을 조율했다. 건강 악화에도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특사로 소련과 협상했으며,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 시점과 일본 점령 구역을 물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쟁점을 드러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3–1915뉴욕 빈곤개선협회 가족복지부 고용국 감독관
  • 1915–1918뉴욕시 아동복지국 사무국장
  • 1921–1923미국 적십자 남서부 지부 총괄 관리자
  • 1933–1935연방긴급구호청장
  • 1935–1938공공사업진흥청장
  • 1938–1940미국 상무장관
  • 1940–1945루스벨트 대통령 특별보좌관·전시 특사
  • 1945트루먼 대통령 특사, 모스크바 회담 대표
  • 1946뉴욕에서 사망

존 P. 루카스

John Porter Lucas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0–1949 ○ 자연사

안치오의 신중한 지휘관

“그들은 병력이 부족한 나를 상륙시켜 심각한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미 육군 소장 존 P. 루카스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 복무한 직업군인으로, 상륙작전의 기획과 지휘를 맡았다. 1944년 안치오에서 미 제6군단을 지휘하며 기습의 성과를 즉시 확대하기보다 교두보를 공고히 하는 길을 택했고, 그 선택은 작전의 조건과 상급 지휘부의 모호한 명령이 얽힌 논쟁이 되었다. 독일군의 반격을 버텨 냈지만 곧 지휘권을 잃었으며, 이후에도 중국 국민정부 군사고문단과 미 제5군에서 복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미 육군 소위 임관, 기병 장교
  • 1916멕시코 징벌 원정 참가
  • 1918제33보병사단 제108야전통신대대 지휘, 프랑스에서 부상
  • 1932–1936전쟁부 참모본부 인사과 근무
  • 1941–1942제3보병사단장
  • 1943–1944미 제6군단장, 이탈리아 전선과 안치오 상륙작전 지휘
  • 1946–1948중국 국민정부 주재 미 군사고문단장
  • 1948–1949재편성 미 제5군 부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90–1969 ○ 자연사

노르망디 상륙을 지휘하고 군산복합체를 경고한 5성 장군 대통령

이런 종류의 일에 뛰어들 때는 단 하나만 명심해야 하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웨스트포인트 졸업
  • 1942–1945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
  • 1945미국 점령 독일 군정장관
  • 1945–1948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48–1953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 1951–1952NATO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53–1961제34대 미국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