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84–1972 ○ 자연사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으로 냉전의 미국 틀을 세운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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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미주리주 라마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 포병대 대위로 참전
  • 1935–1945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 위원회로 전시 계약 부패 조사
  • 1945.01–04부통령, 루스벨트 사망으로 4월 12일 대통령 승계
  • 1945–1953제33대 대통령, 원자폭탄 투하·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NATO 창설·한국전쟁
  • 1947.03.12트루먼 독트린 선언, 그리스·터키 군사원조 요청
  • 1948.04.03마셜 플랜(경제협력법) 서명
  • 1951.04.11맥아더 극동사령관 해임

존 포스터 덜레스

John Foster Dulles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인 1888–1959 ○ 자연사

동맹망으로 냉전을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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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프린스턴대학교 졸업
  • 1911설리번 앤드 크롬웰 국제변호사
  • 1919파리 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법률고문
  • 1945–1950유엔 회의·총회 미국 대표 및 외교 고문
  • 1950–1952트루먼 대통령 대일 강화조약 특별고문
  • 1953–1959미국 국무장관
  • 1954베를린 회의 참가, 서독 NATO 가입 협상 주도
  • 1959국무장관 사임, 5월 24일 사망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90–1969 ○ 자연사

노르망디 상륙을 지휘하고 군산복합체를 경고한 5성 장군 대통령

이런 종류의 일에 뛰어들 때는 단 하나만 명심해야 하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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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웨스트포인트 졸업
  • 1942–1945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
  • 1945미국 점령 독일 군정장관
  • 1945–1948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48–1953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 1951–1952NATO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53–1961제34대 미국 대통령

에드워드 맬러리 알몬드

Edward Mallory Almond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92–1979 ○ 자연사

공세적 지휘와 인종주의가 얽힌 미군 장성

“중국인 세탁부대 따위가 우리를 막게 두지 마라.”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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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 1918제4사단 제12기관총대대 지휘, 프랑스 전선 참전
  • 1942–1945제92보병사단 사단장, 이탈리아 전선 지휘
  • 1946–1949도쿄 극동사령부 인사참모, 이어 맥아더의 참모총장
  • 1950–1951X군단 사령관, 인천상륙과 동북부 작전 지휘
  • 1951–1953육군전쟁대학 교장, 1953년 퇴역

앨런 덜레스

Allen Dulles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3–1969 ○ 자연사

비밀전쟁을 제도화한 미국 정보 관료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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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6미 국무부 외교관, 유럽·근동 담당
  • 1927–1944외교·군축 협상 법률고문, 외교협회 간사·회장
  • 1942–1945OSS 베른 지국장, 작전 선라이즈 협상 담당
  • 1945OSS 베를린 지국장
  • 1951–1953CIA 계획 담당 부국장, 중앙정보국 부국장
  • 1953–1961중앙정보국장
  • 1963–1964케네디 암살 진상조사 워런위원회 위원

올리버 P. 스미스

Oliver Prince Smith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3–1977 ○ 자연사

신중함으로 포위된 사단을 구한 해병 지휘관

“후퇴라니, 지옥에나 가라! 우리는 그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중이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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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미 해병대 소위 임관
  • 1934–1936프랑스 육군 고등전쟁학교 수학
  • 1944제5해병연대장, 뉴브리튼 작전 지휘
  • 1944–1945제1해병사단 부사단장, 펠렐리우·오키나와 작전
  • 1950–1951제1해병사단장, 인천·서울·장진호 작전
  • 1953–1955대서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
  • 1955대장으로 퇴역

마크 W. 클라크

Mark W. Clark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6–1984 ○ 자연사

전쟁의 성과와 민간인 피해 사이에 선 연합군 지휘관

1953년 7월 27일, 마크 W. 클라크는 판문점 정전협정에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서명했다.

마크 W. 클라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국 육군 장성으로, 연합전의 참모 역량과 현장 지휘를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 점령과 독일군 항복을 이끌었지만, 라피도강 작전과 몬테카시노 폭격을 둘러싸고 작전 판단과 민간 유산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말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공세와 정전협상을 병행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유엔군 측 대표로 서명했다. 그의 경력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가 연합 지휘체계와 전쟁의 파괴성을 어떻게 함께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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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미 육군 보병 소위
  • 1942북아프리카 연합군 작전 부사령관
  • 1943–1944미 제5군 사령관, 이탈리아 전선
  • 1944–1945제15군집단 사령관, 이탈리아
  • 1945–1947오스트리아 미군 점령군 총사령관
  • 1947–1949미 제6군 사령관
  • 1949–1952미 육군 야전군 사령관
  • 1952–1953유엔군사령부·극동군사령부 총사령관

조지 F. 케넌

George F. Kennan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4–2005 ○ 자연사

1946년 장전문과 X 논문으로 봉쇄 정책을 설계한 미국 외교관·역사가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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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3–1936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 1944–1946주소 미국대사관 공사참사관, '장전문' 송신
  • 1947–1949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 마셜 플랜 설계, X 논문 발표
  • 1952주소 대사,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56–2005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외교사 저술
  • 1961–1963주유고슬라비아 대사

커티스 E. 르메이

Curtis LeMay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6–1990 ○ 심장마비

일본을 불태우고 상대에게 핵폭격을 주장한 공군 원수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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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제305폭격단장, 유럽 전선
  • 1944–1945제21폭격사령부 지휘관, 일본 소이탄 공습
  • 1947–1948미 유럽공군(USAFE) 사령관, 베를린 공수 개시
  • 1948–1957전략공군사령부(SAC) 사령관
  • 1957–1961미 공군 부참모총장
  • 1961–1965미 공군 참모총장
  • 1968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후보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8–1973 ○ 자연사

개혁과 전쟁 사이의 냉전 대통령

1968년 7월, 미국과 소련이 전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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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9텍사스 제10선거구 연방 하원의원
  • 1949–1951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
  • 1951–1953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 1953–1955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 1955–1961상원 다수당 원내대표
  • 1961–1963미국 부통령
  • 1963–1969미국 제36대 대통령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8–1987 ○ 심장질환

6단계 쿠바 전복 계획으로 소련에 침공의 확신을 안긴 몽구스 작전의 설계자

맥나마라가 전황 측정 지표에 적어둔 'X 인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랜스데일은 '베트남 농촌 서민들의 감정'이라고 답했다. 맥나마라는 연필로 그 항목을 지워버렸다.

미 공군 소장으로, 광고계에서 군 정보장교로 전향한 후 필리핀 훅발라합 반란 진압에서 심리전을 무기화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군사임무단을 이끌며 응오딘지엠 정권을 뒷받침했고, 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게 몽구스 작전의 6단계 계획을 제출해 그해 10월 쿠바 내 반란과 정권 전복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 문서는 소련이 쿠바 침공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핵심 근거가 되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한 고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엠 축출에 반대하며 1963년 강제 전역했고, 말년에는 심리전과 대분란전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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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7육군 군사정보대 및 OSS 복무, 소령 진급
  • 1947–1950미 공군 대위로 전군, 전략정보학교 교관
  • 1950–1954필리핀 합동군사원조단, 훅발라합 반란 진압 심리전 지휘, 막사이사이 대선 승리 지원
  • 1954–1957사이공 군사임무단장, 지엠 정권 수립 지원, 북부 가톨릭 남하 작전 주도
  • 1957–1961국방부 특수작전 부차관보, 해외 대분란전 기획
  • 1961–1963몽구스 작전 작전책임자, 케네디에게 6단계 쿠바 전복 계획 제출(1962.2)
  • 1965–1968주사이공 미국 대사관 참사관, 대분란전 자문
  • 1963공군 소장으로 강제 전역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11–2004 ○ 자연사

핵폐기를 진심으로 믿었으나 SDI만은 양보하지 않았던, 냉전의 마지막 미국 대통령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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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일리노이주 탬피코의 아일랜드계 가정에서 출생
  • 1937–1964할리우드 배우, 영화 53편 출연, 영화배우조합 회장 역임
  • 1967–1975캘리포니아 주지사, 대학 시위 진압과 복지 개혁 추진
  • 1981–1989제40대 대통령, 레이거노믹스·군비 증강·'악의 제국' 연설
  • 1986.10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전면 핵폐기 직전까지 갔으나 SDI로 결렬
  • 1987.06브란덴부르크문 앞 '이 벽을 허무시오' 연설
  • 1987.12INF 조약 서명, 중거리 핵미사일 전량 폐기
  • 1994–2004알츠하이머병 진단,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13–1994 ○ 뇌졸중

데탕트로 소련과 핵무기 제한의 틀을 열고 워터게이트로 무너진 유일한 사임 대통령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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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William Westmoreland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14–2005 ○ 자연사

1964~1968년 남베트남 주둔 미군을 지휘하며 소모전과 사살 집계를 앞세운 미국 육군 장군

웨스트모얼랜드는 베트남전에서 소모전과 ‘수색·섬멸’을 채택하고 적 사살 집계를 성과의 핵심 척도로 삼았다. 미군 병력은 50만 명을 넘었지만, 적은 손실을 보충했고 전쟁 승리라는 그의 낙관적 주장은 1968년 뗏 공세 뒤 신뢰를 잃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1936년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2차 대전 유럽 전선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64년 1월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6월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를 맡았다. 해병대 상륙 뒤 방어 위주에서 벗어나 미군이 직접 적을 찾아 섬멸하는 소모전을 주장했고, 대규모 포격과 공습을 썼다. 1967년 11월 「끝이 보인다」고 말했으나 1968년 뗏 공세 뒤 20만 명 증파 요청이 알려지면서 3월 교체되었다. 1968~1972년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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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 1942–1945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34야전포병대대를 지휘하고, 이후 제9보병사단 참모장을 지냈다.
  • 1958–1963제101공수사단장에 이어 웨스트포인트 교장을 지냈다.
  • 1964–1968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소모전을 지휘했다. 뗏 공세 뒤 미국으로 돌아와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 1968–1972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a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16–2009 ○ 자연사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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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냉전의 최전선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간 최연소 미국 대통령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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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1953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53–1960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 1961–1963제35대 미국 대통령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폴란드 1928–2017 ○ 자연사

소련을 아프간 늪으로 끌어들인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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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1국가안보보좌관
  • 1973–19763극위원회 디렉터
  • 1966–1968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1960–1972컬럼비아대학교 교수, 공산권연구소 소장
  • 1953–1960하버드대학교 교수
  • 1981–2017존스홉킨스대학교 SAIS 교수, CSIS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