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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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레너

Karl Renner

생제르맹 조약에 서명하고 1945년 제2공화국을 세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자

모라비아의 독일계 농가에서 태어나 빈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1907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민족 문제에서 「개인적 자치」를 내세운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레닌과 스탈린의 비판을 받았다. 1918년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첫 총리가 되어 대연정을 이끌며 8시간 노동제 등을 도입했고, 생제르맹 조약으로 독일과의 합병 금지와 영토 상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1938년 합병을 지지했다. 1945년 4월 소련군의 지시로 임시정부를 세웠고 그해 대통령이 되었다. 1950년 빈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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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자당 입당
  • 1907–1918제국의회 의원
  • 1918–1920독일-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 총리 겸 외무장관
  • 1919생제르맹 조약 협상 대표단장
  • 1931–1933국민의회 의장
  • 1945임시정부 총리, 독립 선언
  • 1945–1950오스트리아 대통령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인종주의 전쟁국가를 만든 독재자

1942년 여름,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코카서스 석유와 볼가 강 유역을 동시에 겨냥하게 했고, 그 결과는 제6군의 포위와 파괴로 이어졌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세습으로 가졌고, 1913년 뮌헨으로 옮겨 스스로 무국적으로 신고했다. 1919년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가 1921년 당수가 되었고,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복역 중 《나의 투쟁》을 구술했다. 1925년 오스트리아 시민권에서 해제되어 1932년 독일 시민권을 얻기까지 무국적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수상이 되어 3월 23일 전권위임법으로 독재를 구축했고,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사망 후 국가원수를 겸했다. 그의 정권은 약 600만 유대인 학살과 민간인·포로 약 1,930만 명의 의도적 살해에 책임이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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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1918오스트리아 출생,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복무
  • 1919독일노동자당 가입, 정치 활동 시작
  • 1921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지도자
  • 1923–1924뮌헨 폭동 실패, 투옥 중 《나의 투쟁》 집필
  • 1933독일 국가수상, 나치 독재 수립
  • 1934–1945총통 겸 국가원수, 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2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분할, 스탈린그라드·코카서스 공세 지시
  • 1945베를린에서 자살

루트 피셔

Ruth Fischer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오스트리아 1895–1961 ○ 자연사

유럽 대중공산당의 첫 여성 지도자, 그리고 가장 날카로운 반스탈린주의 전향자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에는 테러가 지배하고 있다.” — 마슬로프에게 보낸 편지가 소련 검열에 적발되며 공개 낭독되었고, 이것이 스탈린과의 결정적 단절이 되었다 (1926년 2월, 코민테른 특별회의).

독일공산당(KPD) 공동의장(1924–1925)으로 유럽 주요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빈 철학 교수의 딸로 태어나 1918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공동 창립했고, 베를린에서 마슬로프와 함께 KPD 극좌파를 이끌며 1923년 봉기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공개 비난할 만큼 치열한 파벌 투사였으나, 1926년 스탈린에게 복종을 거부하며 축출된 뒤 평생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망명지 미국에서 정보기관 협력자로 전락했다가 말년에 다시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극적인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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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오스트리아 공산당(KPÖ) 공동 창립 — 당원 번호 1번
  • 1919–1921베를린으로 이주, KPD 입당
  • 1921–1923베를린 지역당 지도자 — 마슬로프와 함께 KPD 좌파의 '공세 이론' 주창
  • 1924–1925KPD 공동의장 — 제국의회·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 후보
  • 1924코민테른 제5차 대회 독일 대표단장 — 트로츠키 공개 비난
  • 1925–1926모스크바에 강제 체류 — 스탈린의 당 노선 복종 요구 거부
  • 1926KPD 제명 — 통합야당 지지
  • 1928레닌분트 참여 후 곧 탈퇴
  • 1933–1941파리 망명 — 트로츠키와 협력, 국제그룹 결성
  • 1941–1955미국 망명 — 《스탈린과 독일 공산주의》(1948) 출간
  • 1947하원 반미활동위원회(HUAC)에서 형제 게르하르트·한스 아이슬러에게 불리한 증언
  • 1955–1961파리 귀환 — 《레닌에서 마오까지》(1956) 출간, 반공주의 철회

오토 스코르체니

Otto Skorzeny

나치 특수작전의 지휘관이자 선전의 산물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 앞에 선 장면은 실제 지휘권보다 선전의 공로가 더 크게 기록된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스코르체니는 Waffen-SS 장교로서 나치 독일의 사보타주와 특수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그란사소 작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위치를 찾고 SS 분견대를 이끌어 현장에 참여했지만, 작전 전체의 계획과 지휘는 공수부대 장교 하랄트 모르스와 쿠르트 슈투덴트의 몫이었다. 나치 선전은 그를 ‘무솔리니의 구출자’로 내세웠고, 그는 헝가리 정권 전복과 아르덴 공세의 위장작전에도 관여했다. 전후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스페인에서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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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오스트리아 나치당 가입
  • 1938오스트리아 병합 과정에서 SS 대원으로 활동
  • 1943RSHA 제6국 특수공작 부문 지휘
  • 1943그란사소 작전에서 SS 분견대 지휘
  • 1944헝가리 판처파우스트 작전 관여
  • 1944아르덴 공세 그라이프 작전 지휘
  • 1947다하우 군사재판에서 무죄 판결
  • 1953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