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링겐 줄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재무부 관리로 1차 세계대전 초 독일의 식량 공급을 조직했다. 1917년 해운회사 함부르크-아메리카 노선에 들어가 사장이 되었다. 1922년 11월 의회 표결 없이 대통령령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최초의 무당파 총리가 되어 「실무 내각」을 꾸렸다. 1923년 1월 프랑스·벨기에군이 루르를 점령하자 소극적 저항을 호소했고, 그 비용을 주로 돈을 찍어 대면서 초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파업의 물결 속에 8월 사회민주당이 낸 불신임으로 물러났다. 1932년 히틀러의 경제 자문에 참여했고 1933년 1월 죽었다.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6–1918페트로그라드대학 일본문헌학과 입학, 해군 사관후보생 학교 졸업 후 해군 복무
1919–1922붉은군대 동원, 크론시타트 요새 포대장·사단장 보좌
1923–1928붉은군대 군사기술아카데미 졸업
1928–1933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탄 RS-82·RS-132 개발 주도
1934–1937로켓연구소(RNII/NII-3) 부소장 겸 수석기술자, 군사기술 1급 공병
1937–1938NKVD 체포, 1938년 1월 11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당일 총살
하노버주 뮌덴에서 태어나 1918년 수병 반란에 가담했고 1919년 공산당에 들어가 당 군사조직을 이끌었다. 1932~1933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망명 중 1936~1940년 「볼베버 동맹」을 조직해 파시스트 국가들의 선박에 21건의 파괴공작을 벌였고, 스페인 공화국군에 무기를 댔다. 1946년 귀국해 해운 행정을 맡았다. 1953년 7월 차이서가 물러나 국가보안부가 국가보안청으로 격하되자 그 수장이 되었고, 1955년 11월 다시 국가보안부 장관이 되었다. 울브리히트·호네커와 충돌하고 시르데반 편에 섰다가 1957년 물러났고, 1958년 「분파 활동」으로 중앙위원회에서 쫓겨났다. 1967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헤센 라우터바흐의 구리 세공인 아들로 열일곱에 광부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 나가 1918년 병사평의회에 들었다.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1922년 공산당에 들어가 작센 지구당 정치 책임자와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감옥과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등 강제수용소에서 나치 시대를 버텼다. 전후 작센 경제·계획장관을 거쳐 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동독에서 공업장관과 중공업장관을 지냈다. 1953년 6월 16일 각료의 집 앞 군중 속에 들어가 책상 위에서 연설했으나 야유에 묻혔다. 1958년 울브리히트에게 「일탈적 태도」로 몰려 직책에서 밀려난 뒤 작가로 살았고, 197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