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허헌

허헌
남조선로동당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족 1885–1951 ✕ 익사

3·1운동을 변론한 민족인권변호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된 진보적 민족주의자

3·1운동 재판에서 '공소불수리론'을 제출하자 일제 검사들이 법정에서 반발했고, 그 광경은 전국 신문에 보도되어 허헌을 항일변호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3대 민족인권변호사'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론하고 노동자와 독립운동가의 무료 변론을 도맡은 대표적 항일변호사였다. 1927년 좌우합작 단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항일민족전선을 이끌었고,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와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을 거쳐 월북하여 조선 근대 민족운동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가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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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대한제국 제1회 변호사시험 합격
  • 19193·1운동 민족대표 변론, 조선변호사회 회장
  • 1927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 1945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
  • 1946남조선로동당 위원장
  • 1948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대학 총장

김두봉

김두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관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889–1958? ↓ 실각 후 실종 1958

독립운동가이자 언어학자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를 지낸 연안파 지도자

1948년 7월,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인공기를 채택한 날, 김두봉이 직접 태극기를 내리고 새 국기를 게양했다. 1년 전만 해도 그는 소련 장군에게 태극기의 철학적 의미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사람이었다.

주시경 문하의 한글학자 출신 독립운동가로, 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이끌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원수에 올랐으나 실권은 김일성에게 있었고, 1958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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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6주시경 문하에서 한글 연구, 《말모이》 편찬 참여
  • 19193·1 운동 참가 후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 1920–1930년대상하이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언어학 연구 병행
  • 1942–1945옌안에서 조선독립동맹 결성, 옌안파 지도
  • 1946.02–08조선신민당 위원장
  • 1946.08–1949.06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09–1957.09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초대 국가원수
  • 1957–19588월 종파 사건 연루로 모든 직위 해임, 실종

김원봉

김원봉
북조선로동당 아나키스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족 1898–1958 ↓ 사망

의열단 창설자로서 조선의용대·광복군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 이른 무장투쟁가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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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의열단 창설, 단장(의백) 취임
  • 1926황푸군관학교 제4기 입학
  • 1935조선민족혁명당 창당
  • 1938조선의용대 편성, 대장 취임
  • 1944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 1948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
  • 1952내각 노동상
  • 1957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책

김책
중국공산당 혁명군(1949년 이전) 중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3–1951 ✕ 전시 과로사

만주 항일유격대에서 김일성과 함께 싸운 조선의 혁명군사 지도자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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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조선공산당 입당,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체포·투옥
  • 1930중국공산당 입당, 동경성구위 서기
  • 1933–1940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4사 정치부 주임, 북만임시성위 서기
  • 1942–1945소련 극동 제88국제여단 제3영 정치위원
  • 1945–1946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주도, 평양학원 초대 원장
  • 1946–1948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
  • 1948–1951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 민족보위성 부상 겸직
  • 1950–1951한국전쟁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김무정

金武亭
중국공산당 혁명군(1949년 이전) 중국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4–1952 ↓ 병사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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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중국공산당 입당
  • 1934–1935중국 홍군 대장정 참가
  • 1937–1940팔로군 포병사령관
  • 1942조선의용군 총사령
  • 1946북조선로동당 제2비서
  • 1948민족보위성 부상 겸 제2지휘소 사령관
  • 1950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김일성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관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12–1994 ○ 병사

소련 극동에서 귀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자

1945년 10월 14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평양 운동장에 모여 소련군 해방 환영대회를 열었다. 소련 장군이 '민족의 영웅,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 김일성 동지'를 소개하자, 연단에 오른 것은 33세의 젊은이였다. 군중은 50대쯤 되었을 전설적 게릴라의 실제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항일 유격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 소련 극동의 제88독립소총여단에 속했고, 1945년 이후 소련 점령 당국의 후원 아래 조선 북부의 권력 중심으로 부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뒤 당·국가·군의 권력을 장기적으로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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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만주 항일 유격대 활동
  • 1942–1945소련 제88독립소총여단 복무
  • 1945–1948소련 점령기 북부 조선의 권력 기반 형성
  • 1948–1972내각 수상·노동당 지도자
  • 1961소련과 우호·협조·상호원조 조약
  • 1972–199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