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옙세이 그리고리예비치 리베르만

Ев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Либерман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897–1981 ○ 심장마비

1965년 경제 개혁의 이론적 촉매

「사회에 이로운 것은 모든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 — 1962년 《프라우다》 논문의 핵심 명제

소련의 경제학자. 1962년 9월 《프라우다》에 발표한 논문 「계획, 이윤, 프리미엄」으로 전연방 경제 토론을 촉발하여 1965년 코시긴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윤 지표를 기업 평가의 핵심으로 삼고 '사회에 이로운 것이 개별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련 최초의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을 창설했고, 1938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39년 말 복권되었다. 아내 레기나 고로비츠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누이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볼린현 슬라부타에서 산림영지 관리인의 아들로 출생
  • 1920키예프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23–1929우크라이나 노동연구소 실습생, 할키우 공장에 소련 최초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 창설
  • 1930–1941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기계제조업 조직·계획 주임
  • 1938–1939NKVD에 간첩·테러 혐의로 체포, 15년형 선고 후 1939년 말 복권
  • 1941–1943키르기스 SSR 재무부 근무
  • 1947–1962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교수, 기계제조업 경제·계획 연구실 창설
  • 1956경제학 박사 (논문: 사회주의 기업의 수익성 제고 방안)
  • 1962《프라우다》에 「계획, 이윤, 프리미엄」 발표 — 전연방 개혁 논쟁 촉발
  • 1962–1981하리코프대학교 통계·회계학과 교수
  • 1981할키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스네고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негов

굴라크 생존자로서 탈스탈린화를 밀어붙인 구볼셰비키

미코얀이 소치행을 권했지만, 스네고프는 당원증을 돌려받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버텼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가입
  • 1918–1921빈니차·포돌리아 지하 당조직과 포돌리아 губер니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3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31–1937자캅카스·이르쿠츠크·첼랴빈스크·차파옙스크·무르만스크의 당·정치 부문 간부
  • 1937–1954대숙청으로 체포되어 굴라크와 유형지에서 15년 이상 복역
  • 1954–1960석방·복권 후 내무부 굴라크 정치부장
  • 1956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과 희생자 복권을 촉구
  • 1967잠시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곧 복권

알렉세이 마트베예비치 루먄체프

Алексей Матвеевич Румянцев

흐루쇼프의 경제 토론을 연 정치경제학자, 소련 사회학의 제도적 창립자

「모든 사회구성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는데, 사회주의 구성체만은 조직화된 대중행동으로 생겨났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연구소 간부 회의에서 (V.A. 야도프 회고)

흐루쇼프 해빙기의 경제학자. 1962년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실어 경제개혁 논쟁을 촉발했고, 소련 최초 사회학 연구소를 창립했다. 코무니스트·프라우다 주필을 지냈으나 자유주의 성향으로 해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하리코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5–1943우크라이나 SSR 농업·법무인민위원부 근무 후 하리코프대학·기계제조연구소 정치경제학 교수
  • 1940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지도교수 오스트로비탸노프, 심사 셰필로프
  • 1943–1949하리코프 주 당위원회 서기 — 흐루쇼프의 우크라이나 당 조직에서 활동
  • 1950–1952우크라이나 SSR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사회과학부 책임자
  • 1952–1955중앙위 경제·역사과학부장, 과학·문화부장
  • 1955–1958『콤무니스트』 주필 — 흐루쇼프 해빙기의 당 이론지
  • 1958–1964『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프라하) 주필 — 유럽공산주의 네트워크의 중심지
  • 1962흐루쇼프 후원으로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게재 — 경제개혁 논의 촉발
  • 1964–1965『프라우다』 주필 — 솔제니친 게재 시도 후 해임
  • 1965–1967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학술서기
  • 1967–1971과학아카데미 부원장 겸 ИКСИ 소장 — 소련 사회학의 제도화
  • 1972ИКСИ의 '지나친 자유주의'로 부원장·소장직 사임, 연구소 재편
  • 1971–1993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집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데멘체프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Деменцев

국가재정의 경고자

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4–1939치타·캄차카 지역 회계·재정 담당
  • 1944–1947캄차카주 통제·감사기관 감사관
  • 1949–1962고르노알타이·야로슬라블주 재정 책임자, 집행위 부의장
  • 1962–1965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가수입관리국장·차관
  • 1965–1973소련 재무부 차관
  • 1973–1986소련 재무부 제1차관
  • 1986–1987소련 국가은행 이사회 의장

게오르기 아르카디예비치 아르바토프

Георгий Аркадьевич Арбатов

데탕트를 설계한 소련 최고의 미국 전문가, 아카뎀고로도크가 아닌 아르바트 거리에 연구소를 세우다

「우리의 진정한 비밀무기는 당신들에게서 적을 빼앗는 것이다」 — 아르바토프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냉전 종식을 설명하며, 1988년 12월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지도자들의 대미 외교정책을 설계한 최고의 미국 전문가. 1967년 미국·캐나다연구소(ISKAN)를 창설해 28년간 이끌며 SALT와 데탕트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4근위박격포대대 정찰대장, 포대장, 연대 참모차장보 — 칼리닌·보로네시·제1·2우크라이나 전선군, 드네프르 도하
  • 1949–1960외국문학출판사 편집자, 《보프로시 필로소피》 부장, 《노보예 브레먀》 부장, 《콤무니스트》 자문역
  • 1960–1963《세계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논설위원 (프라하)
  • 1962–1964IMEMO 분야장, 이념투쟁 연구
  • 1964–1967CPSU 중앙위 국제부 자문그룹장, 브레즈네프 외교정책 자문
  • 1967–1995소련과학원 미국·캐나다연구소(ISKAN) 창설 소장, 아카데미크(1974)
  • 1971–1991중앙감사위원 → 중앙위 후보위원 → 중앙위 위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 1995–2010ISKAN 명예소장, 러시아과학원 고문, 회고록 《체제》 《나의 시대》 집필

타티야나 이바노브나 자슬랍스카야

Татьяна Ивановна Заславская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의 창시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뇌관

「소비에트 경제학자로서 국가로부터 높은 봉급을 받는 11명의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경제와 사회의 상태에 대해 인민 앞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생각한다」 — 1983년

물리학도에서 경제학으로 전향한 키이우 출신 학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농촌사회를 연구하며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을 개척했고, 1983년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진단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다. KGB가 압수했으나 서방으로 유출되어 『노보시비르스크 선언』으로 불리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토양이 되었다. 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VTsIOM 초대 소장, 인민대의원으로 사하로프·옐친과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3–1950모스크바대 물리학과 3년 수료 후 경제학부 우등 졸업
  • 1950–1963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농업 부문 연구, 1956년 кандидат 학위
  • 1963–1987노보시비르스크 IEiOPP, 1967년 사회문제 부서장, 경제사회학 학파 창립
  • 1968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1과학아카데미 정회원(당시 여성 학자 5명 중 한 명)
  • 1983「노보시비르스크 선언」: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사회적 경직을 진단
  • 1986–1991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 1988–1992VTsIOM(전연방 여론연구센터) 창립 소장
  • 1989–1991인민대의원, 사하로프·옐친과 지역간 대의원 그룹에서 활동

이반 티모페예비치 프롤로프

Иван Тимофеевич Фролов

페레스트로이카의 철학적 기초를 놓은 마르크스주의 인문학자: 유전학에서 인간학까지

「나는 '당의 과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한다. 정치는 과학의 철학적 해석에만 관여할 뿐, 과학 자체를 평가할 수 없다」 — 『유전학과 변증법』, 1968년

리센코주의를 철학적으로 무너뜨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으로 페레스트로이카에 '진정한 휴머니즘'을 제시했으며, 생명윤리와 인간 종합연구를 개척했다. 프라우다 주필과 정치국원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모스크바대 철학부 졸업 (은메달)
  • 1958철학 후보박사 — 「결정론과 목적론」
  • 1965–1968CPSU 중앙위 이념담당 서기 보좌관
  • 1966철학 박사 — 「생물학 방법론의 문제들」
  • 1968–1977『철학의 제문제』 주필, 1968년 『유전학과 변증법』 출간
  • 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1987『콤무니스트』 주필, TV 「철학 대화」 진행
  • 1987–1989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과학·교육·문화 보좌관
  • 1989–1991『프라우다』 주필
  • 1989–1990CPSU 중앙위 서기
  • 1990–1991CPSU 중앙위 정치국원
  • 1991–199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인간연구소 창설·소장

레오니트 이바노비치 아발킨

Леонид Иванович Абалкин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수석 경제 이론가,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의 '규제된 시장' 설계자

「우리가 금융 전선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이다」 — 아발킨이 자주 인용한 레닌의 말

모스크바 출신 정치경제학자. 1986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고, 1989년 경제개혁 국가위원장 겸 부총리로 기용되었다. 핵심 구상인 '규제된 시장경제'는 국가 통제 아래 단계적 시장화를 주장했으며,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 제안한 충격요법과 대비되었다. 이 구상은 1990년 5월 최고회의에서 반려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샤탈린의 급진안을 택한 뒤 리시코프 내각이 무너지면서 1991년 초 부총리직을 떠났다. 해체 후 『경제의 제문제』 편집장으로 러시아 사회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옐친식 급진 자유화에 맞서 중국식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58칼리닌그라드주 구세프 농업기술학교 교사·교무부원장
  • 1958–1966모스크바 국립경제연구소 대학원 → 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조교·부교수·교수
  • 1966–1976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76–1985CPSU 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84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1기)
  • 1989–1990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겸 소련 부총리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05–12소련 대통령 고문
  • 1991–2005과학아카데미·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2기)
  • 1992–2011『경제의 제문제』(Voprosy Ekonomiki) 편집장

아르놀트 바실리예비치 보일루코프

Арнольд Васильевич Войлуков

개혁의 이면을 증언한 소비에트 은행가

그는 1991년 개혁의 발상이 국가보안위원회와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했다.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소련 국립은행의 고위 은행가로, 말년 소비에트 금융 운영의 내부를 경험했다. 그는 1991년 1월 화폐개혁을 집행한 기관의 책임자였을 뿐 아니라, 훗날 그 구상이 재무부나 발렌틴 파블로프가 아니라 국가보안위원회와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한 증언자로 중요하다. 그의 회고는 개혁을 둘러싼 제도 간 긴장과, 비밀리에 추진된 조치가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과정을 보여 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55모스크바 금융대학 졸업
  • 1955–1960년대국립은행 지역 기관에서 근무
  • 1960년대–1970년대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 국립은행 현금유통·출납업무 부장
  • 1980년대소련 국립은행 중앙기구 고위 간부
  • 1990–1991소련 국립은행 이사회 부의장
  • 1992–1994러시아 중앙은행 제1부총재

스타니슬라프 세르게예비치 샤탈린

Станислав Сергеевич Шаталин

500일 계획의 설계자, 소련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한 급진 개혁파 경제학자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8–1959재무부 산하 재정연구소 경제연구원
  • 1959–1965고스플란 산하 경제연구소(NIEI) 연구원
  • 1965–1976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부소장·부문장
  • 1970–1983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수리경제분석학 주임교수
  • 1974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6–1986전연방체계연구소 수석연구원, MIPT 일반경제학 강의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과학기술진보경제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9.12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
  • 1989–1996과학아카데미·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 1990500일 계획 작업반장,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통합민주당 창당 조직위원장, '개혁' 국제재단 이사장
  • 1991.06러시아 대통령선거 옐친 신임인

유리 니콜라예비치 아파나시예프

Юрий Николаевич Афанасьев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 칭한 역사가

1989년 5월 27일, 제1차 인민대표회의 연단에서 보수파 의원들을 향해: "여기 계신 분들은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탈린-브레즈네프식 최고회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1989년 제1차 소련 인민대표회의에서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규정한 역사가. 프랑스 아날학파 연구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학장(1986-1991)을 거치며 소련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했고,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을 이끌었다. 1991년에는 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을 설립해 당 고등학교 건물에 독립적 인문학 공간을 열었고, 이후 옐친과 푸틴의 권위주의를 공개 비판하며 마지막까지 체제와 거리를 두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7–1966크라스노야르스크 수력발전소 콤소몰 서기
  • 1972–1981고등콤소몰학교 교수·부총장
  • 1983–1986『콤무니스트』 역사부문 편집위원
  • 1986–1991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총장; 탈스탈린화 주도
  • 1989–1993소련 인민대표;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
  • 1990–1992'민주 러시아' 공동 창립자·공동의장; 1990년 탈당
  • 1991–2003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 설립자·총장

가브릴 하리토노비치 포포프

Гавриил Харитонович Попов

쿠데타 음모를 미국 대사에게 알린 모스크바 첫 민선 시장

1991년 6월 20일 포포프는 미국 대사 잭 매틀록에게 쿠데타 준비를 알리는 쪽지를 건네 파블로프·크류치코프·야조프·루키야노프의 이름을 적었고, 이 경고는 워싱턴을 거쳐 고르바초프에게 전달되었으나 매틀록은 회고록에서 허위 경보였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아조프 그리스인 부모 사이에서 1936년 10월 3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경제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3년 경제학 후보, 1970년 박사, 1971년 교수가 되었다. 모스크바국립대에서 관리학 연구실장과 주임교수, 학장을 지냈으며(학장 시작은 1977년설과 1978년설이 있다), 1988~1990년 『경제문제』 편집장으로 '명령-행정 체제' 개념을 확산시켰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사하로프·옐친 등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을 맡았고, 1991년 6월 12일 65.3% 득표로 모스크바 최초의 민선 시장에 올랐다.

상세 이력 보기
  • 1957모스크바국립대 콤소몰 서기
  • 1960–1961모스크바국립대 콤소몰 서기
  • 1959–1971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대학원 → 강사 → 관리학 연구실장
  • 1971–1988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관리학 주임교수
  • 1978–1980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학장
  • 1988–1990『경제문제』 편집장; '명령-행정 체제' 개념 도입
  • 1989–1990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
  • 1990–1991모스크바 시의회 의장
  • 1991–1992모스크바 시장(최초의 민선); 무상 주택 사유화, 프레펙투라제 도입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솝차크

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бчак

제헌회의 의장을 맡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초대 민선 시장

「볼로댜, 청동으로 굳어지지 말게」 — 푸틴에게 남긴 마지막 말, 2000년 2월

아나톨리 솝차크는 법학자이자 민주개혁가로서, 제헌회의 의장으로 1993년 러시아 연방 헌법 제정을 공동 주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대 민선 시장(1991–1996)을 지냈다. 레닌그라드 국립대 법학 교수 시절 블라디미르 푸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가르친 그는,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드레이 사하로프·보리스 옐친과 함께 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군 지휘관을 설득해 병력 투입을 막고 궁전광장에 20만 시민을 결집시키며 저항을 조직했다. 부패 혐의로 1997년 파리로 망명했으나, 총리가 된 푸틴의 도움으로 1999년 귀국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 1989–1990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 1990–1991레닌그라드 시의회 의장
  • 1991–1996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 1993제헌회의 의장 (러시아 연방 헌법 공동 초안)
  • 1997–1999파리 망명

겐나디 예두아르도비치 부르불리스

Геннадий Эдуардович Бурбулис

벨라베자에서 소련의 사망선고 문장을 던진 철학자

벨라베자 숲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를 향해: "소련이 국제법의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옐친의 최측근이자 소련 해체의 지적 설계자. 우랄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으로, 1991년 9월 가이다르 그룹이 쓴 '부르불리스 메모란덤'을 옐친에게 전해 러시아의 경제적 독립 노선을 결정지었다. 그해 12월 벨라베자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에게 "소련이 국제법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그 문장으로 시작된 합의문에 옐친과 함께 서명했다. 1992년 개혁에 쏟아진 비난의 번개 막대가 되어 물러난 뒤 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조용히 살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73–1983우랄 공대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 강의
  • 1987–1989스베르들롭스크 정치토론클럽 '토론 연단' 창립
  • 1989–1990소련 인민대의원, 지역 간 대의원 그룹 참여
  • 1990–1991옐친 대선 선거본부장
  • 1991.07–1992.05RSFSR 국가서기, 러시아 제1부총리
  • 1991.12벨라베자 합의 공동 서명
  • 1993–1999국가두마 의원(1·2기)
  • 2000–2007노브고로드 부지사, 연방평의회 의원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루츠코이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цкой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러시아 유일의 부통령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71바르나울 고등군사항공학교 졸업
  • 1980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졸업
  • 1985–1988아프가니스탄: 제378독립공격항공연대장, 제40군 공군 부사령관
  • 1988소련영웅 칭호 수여
  • 1990RSFSR 인민대의원, 최고소비에트 위원
  • 1990소련군 참모본부 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91.07–1993.10RSFSR/러시아연방 부통령
  • 1993.09–10의회에 의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 체포
  • 1996–2000쿠르스크 주지사

그리고리 알렉세예비치 야블린스키

Григорий Алексеевич Явлинский

500일 계획의 설계자: 계획경제에서 시장으로의 급진적 이행을 설계한 페레스트로이카 경제학자

1970년대 탄광 연구 중 갱도 붕괴로 동료 넷과 함께 얼음물에 열 시간 갇혔다. 구조되었으나 셋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야블린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구출되었지만, 다섯 중 셋이 병원에서 죽었다」

리보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탄광 노동 연구를 거쳐 1989년 레오니트 아발킨의 부름으로 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이 되었다. 1990년 미하일 자도르노프, 알렉세이 미하일로프와 함께 500일 계획을 작성하여 2년 내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RSFSR 부총리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대안 계획과 절충하며 500일 계획이 무산되자 1990년 10월 사임했고, 이후 독자 싱크탱크 EPICenter를 설립했으며 1993년 야블로코를 창당해 러시아 자유주의 야당의 한 축을 형성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76–1980전소 석탄공업관리연구소(VNIUUgol) 연구원
  • 1980–1989노동·사회문제 국가위원회 중공업 부문장 → 종합부문 부장 → 사회발전·인구국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
  • 1990.07–11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 1991.08–12소련 국민경제 운영관리위원회 부의장 (부총리급)
  • 1991.10–12소련 대통령 직속 정치자문위원회 위원
  • 1990–1993EPICenter 경제·정치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93–2008야블로코당 창당자 겸 당수

예고르 티무로비치 가이다르

Егор Тимурович Гайдар

충격요법의 설계자: 계획경제를 해체하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초석을 놓은 경제학자

1993년 10월 3일 밤 TV 생방송: "이 시간에 경찰과 보안군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모소베트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소련 작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와 파벨 바조프의 손자. 모스크바국립대 졸업 후 《콤무니스트》와 《프라우다》 경제편집자로 시장개혁을 주장했다. 1991년 11월 옐친 정부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으로 들어가 1992년 1월 2일 가격자유화와 민영화를 단행,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는 충격요법을 설계했다. 1992년 6~12월 총리 대행, 1993년 헌정위기 때 TV로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기근과 국가 붕괴를 막았다는 평가와 국민 저축을 쓸어갔다는 비판이 교차하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정책 유산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78–1987전연방체계연구소(VNIISI)·과학아카데미 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7–1990《콤무니스트》 경제정책 담당 편집자
  • 1990《프라우다》 경제부장, 경제정책연구소 설립·소장
  • 1991.11–1992.03러시아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 재무장관
  • 1992.03–12제1부총리; 6~12월 총리 대행
  • 1993.09–1994.01제1부총리 겸 경제장관 대행: 10월 위기 TV 호소
  • 1993–1995국가두마 의원, '러시아의 선택' 원내대표
  • 1994–2001'러시아 민주선택' 당대표, SPF 공동대표(2000)
  • 1999–2003국가두마 의원, 조세·예산법안 주도
  • 1992–2009경제정책연구소(현 가이다르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