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구원을 찾을 곳은 신비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계몽, 인도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각성이다. — 고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창시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텔레스코프』, 『조국의 수기』, 『동시대인』 등 주요 문예지를 무대로 활동하며 푸시킨·고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헤겔 철학을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간 그의 사상은 '문학은 사회를 위해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집약되며, 이는 체르니솁스키와 도브롤류보프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먼 선구가 되었다. 1847년 고골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이 편지는 차르 검열하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페트라솁스키 서클과 후대 혁명가들에게 지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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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1832모스크바대학 문학부 수학, 반농노제 희곡으로 퇴학
1834『텔레스코프』지에 『문학적 환상』 발표로 비평가 데뷔
1838–1839『모스크바 관찰자』 비공식 편집자
1839–1846『조국의 수기』 수석 비평가,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로 부상
1841헤겔주의 '현실과의 화해'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선언
1846–1848네크라소프의 『동시대인』에서 비평 활동, 『1847년 러시아 문학 개관』 집필
「우리는 이 언덕 위에서, 목숨을 바쳐 우리가 선택한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1827년 참새 언덕에서 열다섯 살의 오가료프와 게르첸이 러시아 해방을 위해 나눈 평생의 맹세.
러시아의 시인·철학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1827년 참새 언덕에서 게르첸과 러시아 해방을 위한 평생의 맹세를 나누었으며, 런던 망명 중 《종》(콜로콜)과 《북극성》을 공동 발행하며 개혁기 러시아 여론을 움직였다. 농민 공동체에 기초한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비밀 조직 '토지와 자유'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귀족기에서 라즈노친치기 혁명운동으로의 이행을 이론적으로 매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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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및 윤리정치학부 수학
1834–1839학생 서클 참여로 체포, 펜자 유형 및 주지사 사무실 근무
1841–1846유럽 체류, 베를린 대학 수강, 첫 시 《Otechestvennye Zapiski》 발표
1846–1856펜자 영지에서 벨로오무트 농민 1,800명 해방, 공동체 경영 실험, 첫 시집 출간
「우리 진영의 최후통첩은 이것이다: 부술 수 있는 것은 부숴야 한다. 타격을 견디는 것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고, 산산조각 나는 것은 쓰레기다. 어쨌든 좌우로 내리쳐라, 거기서 해는 나오지 않는다.」 — 『19세기 스콜라철학』(1861)
러시아 허무주의(nihilism)의 중심 이론가이자 186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문학비평의 가장 날카로운 목소리.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와 함께 60년대 급진 지식인을 대표했으며, 『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의 주필로서 미학과 관념론 철학을 공격하고 자연과학에 기초한 '현실주의'를 주창했다. 1862년 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어 4년 반 동안 주요 저작 대부분을 감옥에서 집필했고, 석방 2년 뒤 27세에 발트해에서 익사했다. '합리적 이기주의'와 '사고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으로 나로드니키 세대를 예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니코프, 파블로프의 과학관, 레닌의 지적 형성에 결정적 흔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