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에서 싸우고 망명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쓴 언론인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 언론인 프로스페르올리비에 리사가레는 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생존자 증언과 문서를 모아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썼다.
툴루즈의 바스크계 가정에서 태어나 제2제정기 공화파 강연가·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여러 차례 기소되었다. 1870년 전쟁 중 지방 국민방위정부의 군사 조직에 참여했고, 1871년 코뮌 기간 파리에서 신문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냈다. 피의 주간에는 벨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까지 싸운 뒤 런던으로 탈출해 마르크스 가족과 가까워졌고 엘리너 마르크스와 약혼했다. 1876년 브뤼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펴냈다. 1880년 사면 뒤 돌아와 신문 『라 바타유』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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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창간·편집했다.
1876코뮌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 문서를 바탕으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처음 출간했다.
라콥스키는 1907년 회고록에서 1905년 콘스탄차에 정박한 포툠킨에 올랐을 때 마튜셴코가 자신을 맞이한 말을 전한다.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된 300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입니다.」 직접 인용이 아니라 라콥스키가 전한 회고다.
1879년 5월 2일 하르코프현 데르가치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1년 기근 뒤 학교를 그만두고 하르코프의 철도 급유공, 오데사 항만 노동자, 증기선 화부로 일했으며 로스토프나도누의 마르크스주의 학습회에 들어갔다. 1900년 11월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크론시타트 기뢰기관학교를 마치고 1902년 3월 건조 중이던 전함 포툠킨에 배속되었다. 1904년 11월 세바스토폴 라자레프 막사 봉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사면된 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도왔으나 당적은 갖지 않았다. 1905년 6월 14일(구력, 신력 6월 27일) 함상위원회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고, 망명 끝에 1907년 러시아로 돌아와 체포되어 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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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1징집, 흑해함대 복무
1902.03전함 포툠킨 기뢰 병참장
1905.06.14포툠킨 반란 주도, 함상위원회 의장 (구력 6월 14일 = 신력 6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