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 계획
500-Day Program
1990년 8~9월에 작성되어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한 소련의 시장경제 이행 계획. 러시아어 정식 명칭은 샤탈린-야블린스키 프로그램이며, 「500일」로 통칭된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발의와 공동 결정으로 작업반이 구성되었고, 샤탈린이 계획을 제안하고 그의 작업반이 완성했으나 저자를 야블린스키 한 사람에게 돌리는 오해가 흔하다. 국유재산 사유화, 경제 관리의 분권화, 자유 가격 형성으로의 이행, 사적 기업 활동을 위한 조건 조성을 핵심으로 삼았다. 500일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리시코프 정부는 「기본 발전 방침」 대안을 내고 고르바초프는 절충을 시도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영어권에서는 '충격요법' 프로그램으로 소개된다.
상세
배경
계획은 1990년 8월부터 9월 사이에 작성되고 제출되었다. 작업반은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발의와 공동 결정으로 구성되었고, 계획 자신도 두 사람을 준비의 발의자로 밝히며 그들의 공동 지지 없이는 수행될 수 없다고 적었다. 1990년 8월 작업반은 400쪽 보고서를 냈고, 9월 1일까지 '500일' 계획과 그를 위한 법률 초안 20건이 마련되어 RSFSR 최고회의의 승인을 받고 소련 최고회의에 심의를 위해 제출되었다. 계획의 원문은 1990년 9월 1일자이며 9월 4일 이즈베스티야에 게재되었다. 러시아어 자료는 저자를 야블린스키 한 사람에게 돌리는 오해를 지적하며, 샤탈린이 계획을 제안하고 그의 작업반이 완성했다고 밝힌다. 저자 명단은 알렉사셴코, 바예프, 바빌로프, 그리고리예프, 자도르노프, 마르티노프, 마슈치츠, 미하일로프, 페트라코프, 표도로프, 샤탈린, 야블린스키, 야리기나, 야신의 14인이다.
계획의 서문은 원칙을 '무엇보다 국가를 희생시켜서이지 보통 사람을 희생시켜서가 아니라' 시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규정하고, '국가로부터 가능한 모든 것을 떼어내 사람들에게 넘기는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제목은 '인간, 자유, 시장'이었다. 서문은 또한 다년간의 전체주의적 사회·정치 체제의 지배로 사회가 깊은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하고, 사유화를 국가 재산을 시민에게 이전하는 것으로서 '복수의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의 회복'이며 '국가가 축적한 국민부에 대한 개인의 몫을 법으로 확정하는 형태'라고 규정했다.
내용
계획은 500일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제1단계 100일은 주택·토지·소규모 기업의 사유화, 대기업의 주식회사 전환, 소련 국립은행을 기반으로 한 준비 체계 구축에 배정되었다. 제2단계 150일은 가격 자유화, 제3단계 150일은 시장 안정화, 제4단계 100일은 회복의 시작이었다. 계획은 경쟁적 시장경제, 대규모 사유화, 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 세계경제로의 통합, 연방 정부에서 공화국으로의 대규모 권한 이전을 요구했다. 1990년 8월 보고서의 제목은 '시장으로의 이행'이었고 야블린스키의 앞선 '400일' 구상에 기초했다.
사유화는 철저히 자발적이어야 하고, 상당한 초기 자본이 없는 사람도 여러 형태(임대, 신용 구매, 주식 취득)를 통해 국민부의 몫을 얻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사유화가 '소수의 합법적이고 과도한 부'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설계였다. 계획은 전환의 주된 역할을 공화국 정부와 지방 권력기관에 배정하며 '중앙의 지시에 따라 경제개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고, 공화국들의 주권 선언을 존중하는 데 기초했다.
좌초와 유산
병행하여 소련 각료회의 의장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지시로 대안 사업인 '기본 발전 방침'(Основные направления развития)이 작성되었다. 리시코프는 자신의 안이 채택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했고, 절충안으로 고르바초프는 두 안을 소련 대통령의 단일 프로그램으로 통합할 것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학자 아벨 아간베갼에게 두 제안을 절충 계획으로 융합하도록 요청했고, 그 계획은 500일 계획의 대부분의 내용을 받아들이되 시간표는 담지 않았다. 이미 때는 늦어 옐친이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샤탈린 계획이 그린 개혁 노선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뒤였다. 계획이 중앙 권력의 이양을 수용하고 공화국의 경제적 독립 권리를 승인한 점은 '채택되는 순간 치명적'이었는데, 고르바초프가 중앙 권력의 축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 본인은 1995년 회고에서 대립의 중심을 정부의 리시코프-아발킨 안과 '500일'로 알려진 샤탈린-야블린스키 안의 논쟁으로 설명하고, 당시 시장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정치 세력은 없었으며 다툼은 경로와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고 적었다.
계획의 자체 분석에 따르면 작업반은 샤탈린이 서명한 21건의 요청에 따라 부처와 기관의 정보에 의존했다. 은행들(산업건설은행, 저축은행, 국립은행, 농공은행, 주택사회은행)과 국가통계위원회, 외무부, 식량조달 국가위원회는 완전한 정보를 제공했으나, 국가계획위원회, 대외경제은행, 국방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콤소몰 중앙위원회, 전노조중앙노동조합평의회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고 다른 기관들은 부분적이거나 2차 자료를 제공했다. 서문은 한 달이라는 작업 기한과 정보 부족을 들어 계획에 결함이 있음을 인정했다.
연방 해체 이후 계획의 주요 내용은 대규모 국유재산의 비국유화와 사유화, 대외경제 전환, 주택·공공요금 개혁, 토지 개혁 등으로서, 다른 개혁 구상이 없는 상황에서 실제로 시행되었다. 계획의 정신과 많은 내용이 러시아 공화국의 개혁 기초로 채택되었고, 계획을 작성한 개혁가 다수가 새 러시아 정부의 관료가 되었다. 발트 3국을 제외한 다른 공화국들은 대체로 급진적 개혁을 거부했다.
평가
계획을 영어권에서 '충격요법'으로 소개하며 2년 이내에 소련을 전면적으로 바꾸려 한 계획이고 궁극적으로 소련 해체에 이르게 한 요인이라고 보는 평가가 있다. 이에 맞서 러시아어 자료가 인용하는 전문가들과 야블로코 측 자료는 계획의 목적이 경제동맹을 통해 소련을 단일 경제공간으로 보존하는 데 있었고 실행되었다면 연방이 유지되었으리라고 본다. 야블로코 측은 야블린스키가 주된 작성자이며 그의 계획이 가이다르 정책보다 완화된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현재의 경제 위기와 소련 붕괴의 책임을 작성자들에게 돌리는 비판에 반론을 제기한다. 한편 2005년 올레크 보고몰로프의 평가는 계획이 단일 통화·단일 입법·국방을 포함한 공화국들의 경제동맹을 구상했고, 각료회의의 청산과 공화국 자율성 확대가 '계획을 좌초시킨 주된 이유'였으며 고르바초프가 군산복합체에 양보하고 지지를 철회했다고 본다. 연방 최고회의의 거부 시점을 1990년 10월로 특정하는 서술은 야블로코 측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계획이 채택되지 못하고 그해 가을 무렵 포기되었다는 점만 제시한다.
관련 용어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entry detailing the four-stage timeline, authors, privatization procedure, and the program's rejection at the Union level.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entry covering the program's shock-therapy character, Gorbachev-Yeltsin joint sponsorship, Ryzhkov's repudiation, and its role as a factor in the USSR's collapse.
- cato.org James A. Dorn, 'From Plan to Market: The Post-Soviet Challenge,' Cato Journal 11(2), 1991: provides detailed contemporaneous analysis of the 500-Day Program's structure, its 'Man, Freedom, and Market' framing, and the political dynamics between Gorbachev, Yeltsin, and Ryzhkov.
- 위키백과 (러시아어)
- soviethistory.msu.edu
- 위키백과 (영문)
- yabloko.ru
- encyclopedia.com
- yabloko.ru
- 위키백과 (러시아어)
- cat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