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국민투표 (1991년 3월 17일)
All-Union Referendum of 17 March 1991
소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시된 전연방 국민투표로, 1991년 3월 17일 '평등한 주권 공화국들의 갱신된 연방으로서 소련을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치러졌다. 15개 공화국 중 9개 공화국에서 공식 실시되었으며,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몰도바·아르메니아·그루지야의 6개 공화국은 보이콧했다. 투표자 1억 4,857만 명 중 76.4%가 찬성했으나, 8월 쿠데타와 벨로베즈 협정으로 국민투표 결과는 이행되지 못한 채 소련은 해체되었다.
상세
배경
1990년 12월 24일, 제4차 소련 인민대표대회는 명칭 투표를 거쳐 소련을 평등한 주권 공화국들의 갱신된 연방으로 보존할 필요성을 확인하고 국민투표 실시를 결의했다. 당초 다섯 개 질문이 제안되었다: (1) 평등한 주권 공화국들의 갱신된 연방으로서 소련을 보존할 필요가 있는가, (2) 소련을 단일 국가로 보존할 필요가 있는가, (3) 소련 안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보존할 필요가 있는가, (4) 갱신된 연방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는가, (5) 갱신된 연방에서 모든 민족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할 필요가 있는가. 같은 회의는 고르바초프의 발의로 두 가지 국민투표 결정을 채택했는데, 토지 사적 소유에 관한 결정(찬성 1553, 반대 84, 기권 70)과 갱신된 연방 보존에 관한 결정(찬성 1677, 반대 32, 기권 66)이었다. 실제로는 두 번째 국민투표만 추진되었다. 1990년 12월 24일 대회 결정 제1856-1호는 갱신된 연방 보존에 관한 전연방 국민투표를 각 공화국별 결과를 함께 고려하여 실시키도록 명령하고 날짜 확정을 최고회의에 맡겼으며, 12월 27일에는 소련 법률 '국민투표(소련 국민투표)에 관한 법'이 발효되어 국민투표 소집권이 대회 및 대회 사이의 최고회의에 귀속되었다. 1991년 1월 16일 최고회의 결정 제1910-1호는 국민투표를 1991년 3월 17일 일요일 전 소련 영토에서 실시하기로 하고, 단일 질문에 '찬성' 또는 '반대'로 답하도록 하며 전연방 결과는 각 공화국의 투표 결과를 고려해 산정하도록 규정했다.
보이콧과 지역별 실시
중앙 공화국 국민투표위원회는 9개 공화국(러시아연방,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구성되었다.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몰도바·아르메니아·그루지야 당국은 자국 영토에서 전연방 국민투표를 막았고 이들 지역에는 중앙 공화국 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았으나, 지역 위원회가 존재하는 곳과 군부대에서는 투표가 이루어졌다. 1991년 2월 25일 최고회의는 국민투표를 막는 공화국 법령을 불법이며 집행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지방 당국이 직접 투표구와 선거구를 구성하도록 허용했으며, 국방부·국가보안위원회(KGB)·내무부 군부대의 투표구 및 선거구 위원회가 거주지에서 투표할 수 없는 군인 가족과 시민을 명부에 추가하도록 승인했다.
카자흐스탄 최고회의는 질문 문구를 '평등한 주권 국가들의 연합으로서 소련을 보존할 필요가 있는가'로 바꾸었으나 카자흐스탄 간부회의는 공화국 결과도 전연방 합계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우크라이나 간부회의는 전연방 국민투표를 지지하면서 국가주권선언에 기초해 소비에트 주권 국가들의 연합에 가입하는 문제를 별도 질문으로 추가했다. 같은 날 러시아연방은 러시아 대통령직 신설에 관한 자체 국민투표를 치렀고(투표율 75.09%, 찬성 71.3%), 모스크바에서는 시장 직선제에 관한 투표도 병행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갱신된 연합의 주권적 평등 공화국으로 남는 문제가 투표율 95.5%에서 94.9% 찬성으로,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유사한 주권 추가 질문이 투표율 81.7%에서 62.2%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투표는 조지아 영토의 압하지야(연방 보존 지지 99.06%로 보고)와 남오세티야(44,000명 중 9명만이 보존에 반대)에서도 실시되었는데, 남오세티야에서는 조지아 무장 조직이 츠힌발리를 공격한 날 투표가 진행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지아에서도 투표가 있었고 각각 98%의 지지가 나왔다. 보이콧 공화국에서는 친소련 전선 조직이 공식 승인 없이 자발적 국민투표를 조직했으나 그곳 투표율은 유권자의 50%를 크게 밑돌았고 중앙 국민투표위원회의 공식 발표에서 제외되었다. 보이콧 공화국과 해외 소련 기관·군부대의 군부대 투표구 및 선거구에서 실시된 투표는 전연방 합계에 산입되어 등록 유권자 1,261,721명 중 1,233,858명이 투표해 1,107,980명(89.8%)이 찬성, 113,283명(9.2%)이 반대, 12,595표가 무효였다.
결과와 무산된 이행
공식 수치로는 등록 유권자 185,647,355명 중 148,574,606명이 참여(80.03%)했고 113,512,812명(76.4%)이 찬성, 32,303,977명(21.74%)이 반대, 2,757,817표(1.86%)가 무효였다. 공화국별로는 러시아연방 71.3% 찬성(투표율 75.4%), 우크라이나 70.2%, 벨로루시 82.7%, 우즈베키스탄 93.7%, 카자흐스탄 94.1%, 아제르바이잔 93.3%, 키르기스스탄 94.6%, 타지키스탄 96.2%, 투르크메니스탄 97.9%였으며, 카라칼파크스탄 97.6%, 나히체반 87.3%(투표율 20.6%)였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찬반이 거의 비슷했고 스베르들롭스크는 찬성이 34%에 그쳤다. 키르기스스탄 수치는 출처마다 갈리는데, 공화국 투표표(등록 2,341,646명, 참여 2,174,593명, 92.9%)는 찬성 94.6%를 제시하는 반면 RIA 노보스티가 제시한 96.4%는 고립된 값으로 오류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별도 주권 질문은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80.2%가 찬성했으나, 놀렌·슈퇴버는 81.7%(해당 투표표에서는 81.69%)를 제시한다. 두 수치는 문서상 충돌하며 어느 쪽도 여기서 권위 있는 값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같은 날 갈리치아 지역(이바노프란키우스크, 리비우, 테르노필)의 국민투표에서는 88%가 우크라이나 독립을 지지했다.
1991년 3월 21일 최고회의는 잠정 결과를 검토하여 1억 1,200만 명(유권자의 76%)이 소련 보존을 지지했고 갱신된 수치로는 113,512,812명이었다고 기록했으며, 참여하지 않은 6개 공화국에서 2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찬성표를 던진 것을 시민적 용기라 평가하고 결정 제2041-1호를 채택했다. 이 결정은 소련과 공화국 국가기관이 갱신된 연합에 대한 인민의 결정을 '전 소련 영토에서 최종적이며 구속력 있는' 것으로 따르도록 지시하고, 대통령·연방회의·공화국 최고회의에 새 연방조약의 완성과 서명, 새 소련 헌법 초안 작성에 속도를 내도록 권고했다. 최고회의는 또한 소련 헌법재판 감독위원회에 시민의 국민투표권을 제한하는 공화국 법령의 헌법 합치 여부를 심사하도록 요청했고, 1991년 4월 3일 위원회는 그러한 공화국 당국의 법령이 소련 헌법에 위배된다는 3월 5일자 성명을 확인했다.
국민투표 결과로 노보오가료보 작업반은 '주권 공화국 연합에 관한' 조약 초안을 마련했고 서명은 1991년 8월 20일로 예정되었으나, 1991년 8월 18~21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고르바초프를 강제로 축출하려 시도하면서 서명이 좌초되었다. GKChP의 8월 18일 호소문 자체가 조국 통일을 둔 전국민투표 결과가 짓밟혔다고 주장했으며, 쿠데타는 실패했고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1991년 12월 8일 벨로루시·러시아연방·우크라이나 지도자가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하는 벨로베즈 협정을 서명했고, 12월 11일 소련 헌법재판 감독위원회는 소련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CIS 선언의 주장은 법적 효력 없는 정치적 평가일 수 있다고 밝혔다. 12월 21일 알마아타 협정으로 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발트 3국을 제외한 나머지 연방 공화국이 CIS에 합류했고, 12월 26일 공화국회의는 소련의 존속을 종결하는 선언 제142-N호를 채택했다. 1992년 1월 2일 러시아 최고회의 간부회의는 러시아 내 소련 인민대표 활동을 종료시켰고, 1992년 3월 17일 일부 구 소련 인민대표가 국민투표 1주년에 맞춰 모스크바에서 소련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려 시도하자 이를 러시아 국가주권 침해라고 규정했다.
구분과 의의
1996년 3월 15일 러시아 국가두마는 1990년 12월 27일 소련 국민투표법 제29조에 근거해, 1991년 3월 17일 국민투표 결과가 형식적으로는 법적 효력을 유지한다(다른 소련 국민투표가 실시되지 않았으므로)는 결의와 함께, 1991년 12월 12일 러시아연방 최고회의의 소련 창설 조약 파기 결정을 무효화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연방회의는 이를 재고하도록 요청했고, 1996년 4월 10일 두마는 자신의 결의가 정치적 성격을 가지며 러시아 법체계의 안정이나 국제적 의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같은 해 3월 결의는 여러 CIS 국가(그루지야, 우즈베키스탄, 아르메니아, 몰도바) 지도자와 아제르바이잔 국민의회의 부정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보이콧한 6개 공화국에서는 전연방 국민투표가 공화국 차원의 독립 투표로 대체되었다: 리투아니아는 1991년 2월 9일 투표(투표율 84%, 독립 민주 리투아니아 지지 90.4%, 2월 12일 아이슬란드의 독립 승인),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1991년 3월 3일 투표(라트비아 독립 73.7%,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 77.8%), 그루지야는 1991년 3월 31일 국민투표(투표율 90.79%, 독립 회복 99.08%), 아르메니아는 1991년 9월 21일 국민투표(투표율 95%, 소련 탈퇴 99%)였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주권 국가 에스토니아가 소련에 남아야 하는지를 묻는 병행 투표에서도 과반이 찬성했고, 라트비아의 3월 3일 선거 자문에서는 주민 1,666,128명(유권자의 87.6%)이 참여해 73.7%가 독립을 지지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full background on the five original questions, the 16 January 1991 Supreme Soviet resolution, republic-by-republic results, and the 21 March Supreme Soviet declaration of binding effect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overview of the referendum question, boycott by six republics, additional questions in Ukraine/Uzbekistan/Kirghizia, and the 23 April 9+1 aftermath
- rodina-history.ru Rodina (Russian historical journal): detailed narrative of the parade of sovereignties leading up to the referendum, the five initial questions, and the subsequent Novo-Ogaryovo process
- ria.ru RIA Novosti: detailed turnout and result figures, republic-by-republic breakdown including Sverdlovsk's 34%, and the 10 March Manege Square opposition rally
- zaoerv.de Max Planck Institute for Comparative Public Law and International Law (ZaöRV 75, 2015): legal assessment of the referendum's validity and binding character under Soviet constitutional law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ria.ru
- rodina-history.ru
- zaoerv.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