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chsland Elsaß-Lothringen · 1871–1918

알자스-로렌 병합 (1871)

Annexation of Alsace-Lorraine (1871)

보불전쟁에서 이긴 독일 제국이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알자스 대부분과 로렌 일부를 넘겨받아 1871년 6월 28일 「제국령 알자스-로렌」으로 삼은 일과 그 통치. 연방 구성국이 아니라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직할 영토였고, 1918년 프랑스로 돌아갈 때까지 프랑스 보복주의와 독일의 프랑스 고립 외교의 원천이었다. 제1인터내셔널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870년 9월부터 이 병합에 반대했다.

상세

스트라스부르를 수도로 한 제국령은 독일 제국에서 유일하게 구성국이 아니라 제국 정부가 직접 다스린 영토였다. 프로이센은 주민을 먼저 「독일화」해야 한다고 보아 처음에는 점령지처럼 다루었고 빌헬름 1세가 임명한 총독이 통치했다. 1874년 10월 29일 황제의 칙령으로 구 의회가 임명하는 30명의 지방위원회가 생겼고, 1877년 입법권, 1879년 법률 발의권과 제국 총독직이 더해졌으며, 1911년 헌법으로 양원제 의회와 제한적 자치를 얻었다. 프랑크푸르트 조약에 따라 주민은 1872년 10월 1일까지 프랑스 국적을 택할 수 있었는데 160,878명(10.4%)이 택했고 오랭에서는 20.3%에 이르렀다. 원래는 선택자가 떠나야 했지만 실제로 프랑스로 간 사람은 약 5만 명(3.2%)이었고, 떠나지 않은 약 11만 명은 추방되지 않고 독일 국적을 얻었다. 선택자를 28만 명, 이주자를 13만 명으로 보는 추정도 있다. 주민의 약 90%가 독일어 방언을 썼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을 의심했고 개신교 소수는 독일 편입을 반겼다. 1872~73년 문화투쟁이 이르자 가톨릭 교회는 저항의 통로가 되었고, 1873년 8월 낭시 주교의 재통합 기도 요청 서한이 읽히자 당국은 체포와 가톨릭 언론 금지로 답했다.

1874년 제국의회 의석 15석이 주어진 뒤 1887년까지 선거마다 6~10명이 병합에 반대하는 「항의 의원」이었다. 이들은 「의견을 묻지 않고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독일 제국에 편입된 알자스-로렌 주민에게 이 병합에 대한 의견을 표명할 기회를 달라」는 프랑스어 동의안을 냈으나 큰 표차로 부결되었고, 당선 뒤 회의에 나가지 않았다. 1918년 프랑스로 돌아갈 때도 주민 투표는 없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뒤 제국의 정당들이 세력을 넓혔고, 20세기 초에는 프랑스 복귀를 주장하는 큰 사회 집단이 사라졌다가 1913년 차베른 사건이 긴장을 되살렸다. 병합의 동기와 책임은 논쟁거리다. 독일 군부는 보주 산맥과 티옹빌-메스 길목을 요구했고 여론도 프랑스에 굴욕을 주기를 바랐으며, 비스마르크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마지못해 양보했다」고 보면서 병합을 프랑스를 영구적 적으로 만든 그의 가장 큰 실책으로 꼽는다. 그러나 보복심이 1880년대에는 가라앉았고 알자스-로렌 회복이 1차 세계대전 개전 뒤에야 프랑스의 전쟁 목표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1870년 9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브라운슈바이크 위원회에 병합이 강화를 휴전으로 만든다고 썼고, 위원회의 선언과 총평의회의 두 번째 담화, 베벨과 리프크네히트의 11월 26일 제안은 모두 병합 없는 강화를 요구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영문)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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