Хасанские бои / 張鼓峰事件 · 1938년 7~8월

하산 호 전투

Battle of Lake Khasan

1938년 7월 29일부터 8월 11일까지 하산 호 서쪽 자오제르나야(장고봉)와 베지먄나야(사차오펑) 고지에서 소련군·국경수비대와 일본군이 맞붙은 국경 충돌이다. 1938년 8월 10일 일본 대사 시게미쓰와 소련 외무인민위원 리트비노프가 휴전에 합의해 8월 11일 정오에 전투가 멎었고, 소련군이 고지를 다시 차지했다. 사상자 수치는 사료마다 엇갈린다. 소련 측은 792명 전사·실종과 3,279명 부상·질병을 기록했으나 1938년 8월 31일 주군사평의회에서는 408명 전사로 보고되었고, 일본군 기록은 526명 전사다. 일본 조선군 제19사단이 고지를 점령하고 관동군이 확전을 밀어붙였으나, 7월 충돌의 직접 계기는 NKVD가 지시한 저격수 사살이었다.

상세

어원과 명칭

러시아어 명칭은 하산 호 전투(Хасанские бои)이며, 소련에서는 '하산 호 사건'으로도 불렸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같은 사건을 장고봉 사건(張鼓峰事件, 일본어로 조코호 지켄)이라 부르며, 일본 측은 '장고봉 고지 사건'이라는 표현도 쓴다. 중국어 사료에는 전투 자체를 가리키는 장고봉지전(张鼓峰之战)이라는 표기도 있다.

배경

일본이 1932년 만주 점령을 완료하고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뒤 국경 정세가 악화했다. 1936년부터 1938년 7월 교전 발발까지 일본군과 만주국 군대가 소련 국경을 231차례 위반했고 그중 35건이 대규모 무력 충돌로 비화했으며, 1938년 초부터만 지상 국경 침범 124건과 영공 침범 40건이 기록되었다. 소련이 1937년 8월 21일 중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뒤 중국에 외교적·물자·군사 원조를 제공한 것이 일본이 무력을 쓰게 된 실질적 원인이었고, 국경선 영유권 주장은 구실이었다.

충돌의 발단에는 1938년 6월 13일 훈춘에서 NKVD 극동 책임자 겐리흐 류시코프가 일본으로 망명한 사건도 작용했다. 류시코프는 소련 극동군의 취약한 상태와 장교 숙청 규모를 넘겼고, 국경수비대가 실추된 입지를 만회하려 한 것이 소련의 전진 배치를 설명하는 유력한 원인으로 꼽힌다.

전개

7월 6일 일본 관동군은 포시예트 지역에서 나온 소련 측 전보를 해독했는데, 그 내용은 하산 호 서쪽 비점령 고지, 특히 분쟁 중인 장고봉 고지를 확보하라는 권고였다. 소련 국경수비대는 명령에 따라 8~9일 밤 자오제르나야 고지를 점령하고 철조망과 참호 작업을 시작했다. 이 명령은 NKVD 제1부인민위원 미하일 프리놉스키가 구두로 내렸고 제59국경수비대장 쿠즈마 그레벤니크 대령의 요청으로 형식화되었다. 7월 15일 프리놉스키 일행은 저격수 바실리 비네비틴과 함께 만주 영토로 넘어가 공작 작업을 시연했고, 일본 헌병이 중지를 요구하자 비네비틴이 프리놉스키의 직접 명령으로 헌병 한 명을 사살했다. 이는 확전의 즉각적 계기가 되었다.

같은 날 소련 주재 일본 대사 시게미쓰 마모루가 분쟁 지역에서의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는 항의 각서를 냈고, 소련은 1886년 훈춘 협정과 부속 지도 문서로 자오제르나야와 베지먄나야가 소련 영토임을 제시했다. 그러나 7월 20일 일본은 '불법 점령지'에서의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다시 전달했다. 일본 정부의 처리에는 상부의 제약이 따랐다. 7월 20일 참모총장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이 조선군 사용에 대한 천황의 재가를 구했으나 천황은 정부 동의가 없다는 점과 대소 전면전 가능성을 들어 허가하지 않았고, 육군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강제로 알현해 신속한 무력 사용의 필요를 보고했으나 천황은 만주사변과 지나사변 개전 당시 육군의 행태를 들어 병사 하나도 움직이지 말라고 훈계하며 다시 재가를 보류했다. 7월 22일에 와서야 천황이 이 국경 구역 공격 계획을 승인했다.

한쪽으로 조선군에만 책임을 돌리는 서술은 사실과 어긋난다. 처음에는 방어 임무를 맡은 일본 조선군이 소련군의 전진을 방치했으나, 장고봉과 행정 관할이 겹치는 관동군이 소련의 의도를 의심해 조선군에 행동을 요구했고, 조선군은 문제를 도쿄로 올려 소련에 대한 공식 항의를 건의했다. 일본어 사료는 그전까지 어느 쪽도 장고봉 정상에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았다고 기록하며, 조선군 본부가 1936년 3월부터 장고봉·사차오펑 지역에 병력을 보내지 않기로 했고 소련도 같은 조치를 취해 분쟁 지역이 양측에 의해 보류되어 있었다는 중국어 서술도 있다.

전투는 1938년 7월 29일 시작되었다. 조선군 제19사단(사단장 스에타카 가메조 중장)과 일부 만주국 부대가 그리고리 시테른의 소련 제39소총병군단(제32·제39·제40소총병사단, 제2기계화여단, 전차 2개 대대)과 맞섰다. 7월 31일 고토쿠 사토 대령의 제75보병연대가 야간 기습을 감행해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했다. 소련군은 8월 2일 블류헤르가 포시예트에 도착해 총지휘를 맡고 제40소총병사단에 적 영토를 넘지 않는 공격을 명령했으나 고지는 일본군 손에 남았고, 저녁에 풀레묘트나야 정상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주공세는 8월 2일이 아니라 8월 6일에 시작되었다. 안개가 걷힌 뒤 16시부터 소련 항공기 216대가 일본군 진지를 폭격했고, 17시에 45분 포병 준비 후 소련군이 공격에 나섰다.

8월 8일 제39군단과 제40사단 제118소총병연대가 자오제르나야 고지를 점령하고 보곰롤나야 고지 공방에 들어갔으며, 8월 9일 제32소총병사단이 포병 지원 아래 베지먄나야를 점령해 적을 국경 너머로 밀어냈다. 베지먄나야 점령 시점에 대해서는 휴전 후인 8월 11~12일이었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 8월 10일 휴전 조건이 합의되어 8월 11일 정오에 전투가 멎었고, 일본군은 같은 날 13시 30분에 전투를 중지했다.

예시

전투 규모는 소련군 약 1만 5천 명과 국경수비대, 포 237문, 전차 285대, 기관총 1,014정이었다. 일본군 규모는 논쟁적이다. 소련 측 추산은 2만 명 이상과 포 200문, 장갑열차 3대였고, 미국 연구자 앨빈 D. 쿡스는 최소 1만 명 이상이 참전했으며 그중 7,000~7,300명이 제19사단 전투부대 소속이었다고 보았다. 전투 말기에 배속된 포병 인원은 이 수치에서 빠져 있다.

소련 기갑 손실은 사료마다 다르다. 하산 호에는 T-26 전차 257대(화염방사형 KhT-26 10대 포함), 교량전차 ST-26 3대, BT-7 경전차 81대, SU-5-2 자주포 13대를 포함해 전차·자주포 354대가 집결했는데, 최소 46대(다른 집계로는 운용 불능 45대 또는 80대로 그중 24대 완파)가 격파되고 39대가 부분 손상되었다. 이 경험은 경장갑 T-26이 대구경 대전차총과 대전차포에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냈고, 지휘용 전차뿐 아니라 일반 전차에도 손잡이형 안테나를 장착하기로 하는 결정과 철도 제206호선(바라놉스키~포시예트) 건설로 이어졌다.

일본군의 행태가 문제된 사례도 있다. 소련군 공격 중 제40소총병사단 전차대대장을 포함한 여러 지휘관이 부대를 버렸고, 협조 부족으로 소련군 공격이 큰 손실을 내며 격퇴되기도 했다. 소련 극동 항공대는 8월 1일부터 8일까지 일본군 진지에 1,028소티를 flew했으며, 일부 경우 화학폭탄이 잘못 사용되기도 했다. 다만 목격자와 참전자 증언에 따르면 화학 항공폭탄은 폭격기에 한 번만 적재되었고 공중에서 발견되어 폭발을 피하려고 침전된 호수에 투하되었다.

종전 후 소련군은 러시아어로 '하산 호 전투 참가자' 휘장을 제정했으나, 이 전투는 서방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고 아시아에서 전쟁 중이던 일본도 이를 제2차 세계대전에 포함하지 않았다.

구별

가장 가까운 비교 대상은 1939년 할힌골(노몬한) 전투다. 하산 호는 일본 제19사단과 일부 만주국 부대가 소련 제39소총병군단과 맞선 국지적 충돌이었고, 할힌골은 그보다 훨씬 큰 전역이었다. 일본군은 하산 호의 결과를 분석한 뒤 1939년 할힌골에서 다시 소련군과 교전했고 일본 제6군이 패배했다. 군사적 가치에 대한 학술적 평가는 엇갈리는데, 소련의 승리는 막대하고 상충되게 보고된 손실을 치른 것이었다.

경계선 분쟁의 법적 근거도 양측이 달랐다. 소련 측은 베이징 조약과 1886년 훈춘 경계 협정에 근거해 경계가 장고봉 정상에 있다고 보았고, 일본 측은 하산 호 동쪽으로 지나는 옛 러시아 참모본부 지도를 근거로 삼았으며 훈춘 조약조차 호수 서안까지만 미친다고 주장했다. 갈라진 것은 지상의 사실만이 아니라 법적 입장이었다.

지휘 계통에서도 조선군과 관동군을 바꿔 쓸 수 없다. 이 구역은 조선군이 방어했지만 장고봉에서 관동군과 행정 관할이 겹쳤고, 사건 후인 1938년 9월 30일 대륙령 제215호로 장고봉 방어 임무가 조선군에서 관동군으로 넘어갔다.

확전 책임에 대해서도 평가가 갈린다. 일부 일본 국제법 학자(이리에 게이시로)는 훈춘 경계 조약 부속 지도가 하산 호와 투먼 강 사이로 경계를 그었으므로 일본군이 소련 영토를 침범했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반면 영어권 사료는 만주국이 소련 영토를 침공하려 한 사건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13명의 일본 고위 인사가 하산 호에서의 적대 행위 개시 역할로 평화에 대한 죄로 기소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Alvin D. Coox, The Anatomy of a Small War: The Soviet-Japanese Struggle for Changkufeng/Khasan, 1938 (Greenwood Press, 1977)
  2. Grigoriy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Books, 1997)
  3. 위키백과 (러시아어)
  4. 위키백과 (영문)
  5. ja.wikipedia.org
  6. zh.wikipedia.org
  7. 위키백과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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