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 사회주의 흐라마다
Belarusian Socialist Hramada
러시아 제국의 벨라루스 지역에서 활동한 첫 벨라루스 민족 정당. 1902년 겨울 벨라루스 혁명 흐라마다로 세워져 1903년 12월 이름을 바꾸었다. 사회주의적 개혁과 함께 빌뉴스에 의회를 두는 민족·지역 자치를 요구했고, 뒤에는 독자 국가를 내세웠다. 1917년 혁명 뒤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수립을 이끌었으나 여러 정당으로 갈라졌고, 1919년 7월 27일 활동을 끝냈다.
상세
당은 벨라루스 청년들의 민족·문화 동아리들을 바탕으로 생겼고, 안톤·이반 루츠케비치 형제와 알라이자 파시케비치 등이 창립을 이끌었다. 1903년 12월 빌뉴스의 제1차 대회는 이름을 벨라루스 사회주의 흐라마다로 바꾸고 첫 강령을 채택했는데, 대소비에트 백과사전에 따르면 폴란드 사회당 강령에 빌뉴스 의회를 둔 민족·지역 자치 요구를 더한 것이었다. 당은 토지의 지방 공유화와 노동 입법을 주장했고, 전제정 타도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제국의 다른 좌파 세력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계급 투쟁의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벨라루스인 사이의 계급 투쟁은 부정했다. 당원은 주로 지식인과 농민, 농업 노동자였고 민스크·빌뉴스·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지부가 있었다. 1906년 1월 민스크에서 제2차 대회를 열었으나 1907년부터는 사실상 활동을 멈추고 합법 벨라루스어 신문 『나샤 니바』의 발행에 힘을 모았다. 얀 세라다, 바츨라우 라스토우스키, 즈미체르 질루노비치, 언어학자 브라니슬라우 타라시케비치, 뒤의 라다 의장 바실 자하르카, 라다의 유일한 여성 위원 팔루타 바두노바 등이 당원이었다.
2월 혁명 뒤 흐라마다는 활동을 되살려 벨라루스 자치, 이어 독자 국가 건설에 나섰다. 1917년 9월 마르크스주의 계열 일부가 벨라루스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들려고 떠났고, 10월 14~25일 민스크의 제3차 대회에서는 여러 집단 사이의 큰 이견이 드러났다. 1917~1918년 벨라루스 사회혁명당, 벨라루스 사회주의 연방주의자당, 벨라루스 사회민주당이 갈라져 나갔다. 그래도 흐라마다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 수립에서 큰 역할을 했고, 영어 출처에 따르면 1918년 3월 19일 그 주도로 라다가 임시 의회가 되었으며 라다 위원 대부분이 당원이었다. 볼셰비키는 흐라마다를 적대시해, 레닌은 이를 「좌익 인민주의 성향의 민족주의 소부르주아 정당」이라 불렀고 서부 주 제2차 소비에트 대회는 라다를 반혁명·반소비에트 기구로 선언했다. 당은 1919년 7월 27일 활동을 끝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뒤 폴란드령이 된 서벨라루스에 남은 많은 활동가는 벨라루스 자치를 위해 싸웠고, 1925년 폴란드 의회의 벨라루스 의원들이 세운 벨라루스 농민·노동자 흐라마다는 이름은 비슷하지만 다른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