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 1905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

1905년 1월 9일(구력) / 1월 22일(신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폰 신부가 이끈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서를 바치려고 겨울궁전으로 평화 행진을 벌였으나 제국 근위대의 발포로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날의 총성이 '인민의 아버지 차르'라는 신화를 깨뜨렸고, 러시아 전역의 파업과 시위를 촉발해 1905년 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사망자 수는 정부 측 공식 집계 96~132명에서 반정부 측 주장 4,000명 이상까지 문헌마다 크게 엇갈려 확정된 수치가 없다. 이 항목은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학살을 가리키며,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사건과는 구별된다.

상세

평화 행진에 대한 발포

피의 일요일은 구력 1905년 1월 9일, 신력 1월 22일의 사건이다: 발포는 그 하루에 일어났으며, 항목에는 그보다 긴 기간을 읽어 넣어서는 안 된다. 행렬은 나르바, 넵스키, 비보르크, 페테르부르크 쪽, 바실리옙스키 섬, 콜피노 등 노동자 구역에 있던 가폰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제분 노동자 협회' 11개 지부에서 출발했고, 각 지부장이 청원서 두루마리를 들고 앞장섰다. 계획은 오후 두 시경 궁전 광장으로 집결해 대표단이 청원서를 바치는 것이었다. 행렬은 성화와 십자가, 종교 깃발,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찬송가를 불렀으며, 가폰은 혁명적 요구를 담은 전단을 찢으라고까지 권했다. 그러므로 이 행진은 봉기가 아니라 차르에게 바치는 충성스럽고 종교적인 호소였고, 그 호소는 총기로 해산됐다.

충돌은 궁전 앞에서 한 번 벌어진 교전이 아니라 그날 오전 열 시경부터 다리와 진입로 곳곳에서 벌어진 일련의 충돌이었다. 가폰의 행렬은 나르바 관문 근처에서 발포를 당해 약 40명이 죽거나 다쳤고 가폰 자신은 상하지 않았다. 트로이츠키 다리에서는 행렬이 밀고 나아가자 보병이 일제 사격을 퍼부어 최소 40명이 죽거나 다쳐 운반됐고, 창기병이 도망치는 이들을 뒤쫓아 베고 짓밟았다. 바실리옙스키 섬에서는 카잔 코사크 부대가 칼과 채찍, 말로 공격했고, 오후 두 시경에는 넵스키 대로에서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대가 행진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섞인 군중에게 네 차례 일제 사격을 가했다. 코사크와 기병의 칼 공격은 기록 전반에 걸쳐 되풀이된다.

희생자, 그리고 그 수를 둘러싼 다툼

희생자 가운데에는 협회 의장 이반 바실리예프와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있던 라브렌티예프라는 노인이 있었다. 사망자 수는 문헌마다 엇갈리고 서로 모순되며, 단일한 공식 집계를 확정된 것으로 다룰 수 없다. 차르 정부 관리들은 96명 사망과 333명 부상이라고 했고, 다른 공식 추산은 132명 사망이라 했다. 러시아어판 정보상자는 사망 130~200명, 부상 299~800명, 체포 688명을 제시하고, 영어판 정보상자는 사망 143~234명, 부상 439~800명, 체포 6,831명에 경관 2명 사망을 덧붙인다. 반정부 측은 4,000명 이상 사망을 주장했고, 온건한 추산은 사망·부상 합계 약 1,000명으로 모였다. 트로츠키는 구체적 수치를 대지 않으면서 수백 명이 죽었고 상당수가 비밀리에 매장됐다고 주장했다. 어느 수치를 누구의 이름으로 제시하느냐는 범위만큼 중요하며, 이 항목은 어느 하나를 진실로 채택하지 않는다.

노동자들 자신의 요구, 노동자들 자신의 말

가폰의 협회는 경찰이 후원한 조직이었지만, 그 협회가 만들어 낸 청원서는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함께 담았다. 노동조건 개선, 공정한 임금, 8시간 노동일, 보통선거, 시민적 자유, 정치범 사면, 정교분리가 요구되었고, 그 중심에는 보통·비밀·평등 선거로 소집되는 제헌의회 소집이 있었다. 청원서는 차르가 응답하지 않으면 임의의 지배를 받느니 궁전 앞에서 죽겠다는 경고로 끝났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충성의 언어로 표현했고 대체로 차르를 하나님께서 세운 보호자로 여겨 상황을 알리면 바로 행동하리라 기대했으며, 도시의 혁명 정당들은 정치적 요구가 없다고 보아 이 행진을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대중이 이 틀에 얼마나 들어맞았는지는 신중히 다룰 문제이며, 노동자들 자신의 말도 기록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은 자기 동료를 지킬 권리가 있느냐고 물었고, 한 참가자는 이후 자신이 다시 태어난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잊는 어린이로서가 아니라 투쟁하고 승리할 준비가 된 원한에 찬 사람으로서였다고 회고했다.

정당이 이날의 조직자는 아니었다. 당시 수도에서 활동한 세 조직, 곧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사회민주주의자들, 사회혁명당은 약체였고 1월 사건 기획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으며 파업에 뒤늦게 휩쓸렸다. 다만 청원서가 나온 뒤에는 그것을 선전에 이용하기로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위원회는 차르에게 청원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전제를 전복하는 것만이 자유를 가져온다는 전단을 발행했다.

푸틸로프 공장에서 총파업으로

1861년 농노해방 이후 러시아의 산업화 도시에는 항구적인 도시 노동계급이 형성됐으며, 대체로 미숙련·저임금이었고 하루 최대 15시간까지 불안전한 조건에서 일했다. 1870년대 이후의 파업은 제한적인 공장 입법, 1886년 공장검사법과 1897년 노동일 11시간 반 제한을 이끌어냈다. 1905년 1월의 직접적 계기는 1904년 12월 푸틸로프 공장에서 가폰 협회 회원이던 노동자 네 명이 해고된 일이었다. 협회는 조사 끝에 해고가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네 사람의 복직과 경쟁 단체인 우샤코프 상조회의 지지자로 알려진 감독의 해고를 요구했다. 파업은 1905년 1월 3일 푸틸로프 공장에서 시작해 빠르게 번졌다. 1월 7일 저녁에는 376개 사업장의 노동자 99,000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1월 8일 저녁에는 456개 사업장 111,000명, 1월 10일에는 도시의 625개 기업 전체 노동자 125,000명이 참여했다. 공장검사 체계 밖의 사업장까지 세면 적어도 150,000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형성 중인 대중운동이었지, 손짓 한 번으로 물러나게 할 시위가 아니었다.

발포 결정과 그 책임

발포의 책임은 개별 궁정 인물의 변덕이 아니라 정부와 군 지휘 체계에 있다. 1월 8일 각료와 경찰 수뇌부 회의는 군대를 도시 외곽에 배치하고 노동자를 중심부에 들이지 않으며 불복종 시 무력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고, 궁전 광장에도 군대가 배치됐다. 회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무장한 병사들의 모습만으로 노동자들이 물러설 것이라 여겼던 듯 아무도 유혈 사태를 예상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내무 및 경찰 책임자들은 가폰의 편지와 노동자 청원서를 차르스코예 셀로 가져가 니콜라이 2세에게 보여 주었고, 차르는 이를 일기에 적었다. 무력 진압에 배치된 부대의 총지휘는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지휘하는 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부에 있었다.

니콜라이 2세는 겨울궁전에 없었고 발포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황족들이 수도에 머물라고 권했음에도 그는 1월 8일 토요일에 차르스코예 셀로 떠났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처리의 무능과 무정함에 대해 널리 개인적 책임을 물었다. 한국어 자료에 떠도는, 그리골리 라스푸틴이 유혈 진압을 저질렀다는 서술은 러시아어·영어 사료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 그 사료들은 결정을 1월 8일 회의와 군 지휘 체계에 둔다.

결과

피의 일요일은 차르 정부에 무거운 결과를 낳았다. 분노와 대중 파업이 모스크바, 바르샤바, 리가, 빌나, 코브노, 레벨, 티플리스, 바쿠, 바투미로 번졌고, 1905년 1월 파업에는 약 414,000명이 참여했다. 니콜라이 2세는 두마로 민심을 달래려 했지만, 전제 정권은 그해 후반 무력으로 응답했다. 1905년 10월부터 1906년 4월 사이에 농민과 노동자 약 15,000명이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총살됐고, 20,000명이 부상당했으며 45,000명이 유형에 처해진 것으로 추산된다. 정치적 효과는 어떤 단일 조치보다 깊었다. 차르는 인민의 대변자이자 중재자로 여겨지고 불만의 원인은 보야르들에게 돌려졌으나, 피의 일요일 이후 그는 관료들과 구별되지 않게 되었고 비극의 책임을 개인적으로 물었다. 널리 인용된 반응은 이제 차르가 없다는 것이었다. 협회는 발포 당일 폐쇄됐고 가폰은 막심 고리키의 도움으로 러시아를 떠났다.

1905년 혁명의 시작, 그리고 이름

피의 일요일은 1905년 혁명의 적극적 단계가 시작된 시점으로 여겨지며, 라이오넬 코찬 같은 역사가는 이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진 핵심 사건의 하나로 본다. 레닌은 훗날 1905년을 혁명의 총연습이라 불렀다. 이날을 다룬 후대 작품으로는 비스코프스키의 1925년 무성영화 '1월 9일'과 1905년이라는 부제가 붙은 쇼스타코비치의 1957년 교향곡 11번이 있으며, 그 2악장 제목이 '1월 9일'이다. 화가 V. A. 세로프는 예술아카데미 창가에서 바라보며 진군하는 무장하지 않은 차분하고 위엄 있는 군중이 기병 공격과 총구를 향해 나아가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적었다.

러시아어에서는 같은 사건을 크로바보예 보스크레세니예와 함께 크라스노예 보스크레세니예, 곧 '붉은 일요일'이라고도 부르며, 사료들은 둘을 서로 다른 두 사건이 아니라 한 사건의 다른 이름으로 제시한다. 사건의 유형도 중요하다. 이 용어가 가리키는 것은 평화롭고 무장하지 않은 행렬에 대한 발포이지 전투나 봉기, 군사 반란이 아니다. 그것들은 1905년 혁명의 이후 국면에 별개의 사건으로 나타나며, 포템킨 반란과 농민 봉기, 10월 총파업이 그 예이다. 이 사건이 촉발한 개혁과 구별하는 일도 필요하다. 차르의 8월 선언은 대부분의 자유주의자에게 거부됐고, 사면과 더 깊은 개혁을 담은 10월 17일 선언은 온건 자유주의자들을 만족시켜 반대 진영을 분열시켰으며, 차르는 그 조항들을 희석하거나 회피했다. 1906년 4월 처음 열린 두마는 각료가 차르에게 직접 책임을 졌기 때문에 진정으로 독립된 기관이 아니었다. 이 이름은 1972년 북아일랜드 데리의 총격 사건 등 다른 사건과도 겹치는데, 그것은 별개의 항목이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Detailed account of the massacre, casualties, Gapon's role, and the petition; context of the Putilov strike and march routes.
  2.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article covering the Putilov incident, Gapon's Assembly, and the unfolding of the shootings.
  3. worldhistory.org Narrative of Bloody Sunday including Gapon's petition demands, the march, the firing on crowds, and its role in triggering the 1905 Revolution.
  4. 위키백과 (러시아어)
  5. 위키백과 (영문)
  6. worldhistory.org
  7. 위키백과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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