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항 파업
Canton–Hong Kong strike
5·30 운동에 호응해 1925년 6월부터 1926년 10월까지 홍콩과 광저우에서 벌어진 총파업과 대영 봉쇄. 공산당 계열 노조가 시작했고, 파업대표대회와 쑤자오정이 이끈 파업위원회가 홍콩을 봉쇄했다. 수십만 명이 홍콩을 떠나 광둥으로 왔고 홍콩의 무역은 절반으로 줄었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무장 노동자 기반이 되었으나 북벌을 앞두고 국민당이 영국과 협상해 끝냈다.
상세
파업은 1925년 6월 19일 홍콩에서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은 집회·결사·언론·파업의 자유, 홍콩 화인에 대한 차별 법률 폐지, 보통선거,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 집세 40% 인하를 요구했다. 6월 23일 광저우의 10만여 군중이 사몐 조계 맞은편 사지 거리를 행진하다 영국·프랑스 군의 사격으로 50명 넘게 죽자(사지 참안) 파업은 대영 봉쇄로 번졌다. 8월부터 파업 측은 영국 선박만 홍콩 출입을 막고 다른 나라 배는 통과시켰으며, 순찰대가 국경과 항구에서 영국 상품의 밀반입을 막았다.
파업대표대회는 파업 노조 대표 800명으로 이틀마다 회의를 열어 약 300건의 결의를 통과시켰고, 기관지 《공인의 길》을 냈다. 대회가 선출한 파업위원회는 쑤자오정이 위원장을 맡았으며 분쟁을 판결하는 법정까지 두었다. 7월 말까지 약 25만 명이 홍콩을 떠났고, 홍콩 정부는 300만 파운드의 무역 차관으로 경제 붕괴를 막아야 했다. 파업 기간에 80개가 넘는 노조가 새로 생겼다.
파업은 광저우 정부의 힘이자 짐이었다. 무장 규찰대는 정부의 대중적 기반이 되었지만, 대외 무역에 기대던 재정은 압박을 받았다.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 때 장제스는 파업위원회를 포위하고 좌파 지도자들을 구금했고, 국민당 우파는 파업 종결을 요구했다. 북벌군의 보급을 위해 장제스가 종결을 재촉하자 9월 영국과 협상이 시작되었고, 파업은 10월 요구를 거의 이루지 못한 채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