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브르 앵트루바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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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몰락 뒤 제2차 왕정복고기인 1815년 8월 선거로 뽑힌 프랑스 하원의 별명. 「다시 찾을 수 없는 의회」라는 뜻으로, 루이 18세가 이보다 더 왕에게 유리한 의회는 꿈꿀 수 없다는 뜻으로 불렀다고 한다. 의원 대다수가 혁명의 성과를 거부하는 극단 왕당파(윌트라)였고, 백색테러를 법으로 뒷받침하다가 1816년 9월 5일 왕에게 해산되었다.
상세
선거는 워털루 패전 직후 1815년 8월 14일과 22일, 재산 자격 선거로 치러졌다. 남부와 서부에서는 보나파르트파와 옛 혁명가를 겨냥한 백색테러가 한창이었고, 아르투아 백작의 초록 휘장을 단 왕당파 무리가 마르세유에서 보나파르트파를 학살하고 툴루즈와 아비뇽에서 장군들을 죽였다. 결과는 402석 가운데 350석이 극단 왕당파였다. 의원들은 옛 망명 귀족만이 아니라 젊은 법률가와 상공인도 많았고, 대부분 정치 경험이 없었다.
10월 7일 처음 모인 의회는 「왕보다 더 왕당파」라는 말을 들었다. 삼색기 게양을 금지하고 군사 특별재판소를 세웠으며,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한 국민공회 의원들을 추방했고, 이혼을 폐지했다. 의회는 왕 자신에게도 맞서 「그래도 국왕 만세」를 외쳤다. 루이 18세는 사회의 불만이 커지자 드카즈와 리슐리외 공작, 점령군 사령관 웰링턴, 러시아 대사의 조언을 따라 1816년 9월 5일 의회를 해산했다. 다음 선거에서는 온건 왕당파와 공론파가 다수가 되었고, 1824년 극단 왕당파가 다시 다수를 얻은 의회는 「되찾은 의회(Chambre retrouvée)」라고 불렸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1871년 국민의회의 「농촌 귀족」들을 이 의회에 견주어,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굴러 1816년의 샹브르 앵트루바블에서 멈춘 것 같다고 썼다. 파리를 위해 한마디 하려는 가장 소심한 시도조차 1816년의 샹브르 앵트루바블에서도 볼 수 없던 방식으로 고함에 묻혔다고도 했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의원으로 있던 1849년 프로이센 의회도 「프로이센 샹브르 앵트루바블」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