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cago Boys (Los Chicago Boys) · 1955–1990 (1955년 미국 국무부와 시카고 대학의 칠레 프로젝트로 시작해, 군사 독재가 끝난 1990년 집단으로서의 정치 권력을 잃었다. 그들의 경제 틀은 그 뒤에도 대부분 남았다.)

시카고 보이스

Chicago Boys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밀턴 프리드먼과 아널드 하버거 등에게 배운 칠레 경제학자들. 1973년 쿠데타 뒤 피노체트 군사 독재의 경제 요직을 맡아 물가 잡기를 위한 충격요법, 공기업 민영화, 무역 개방, 연금 민영화를 밀어붙였다. 칠레는 흔히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실험으로 불린다. 프리드먼은 그 결과를 “칠레의 기적”이라 불렀으나, 이 정책이 독재 아래에서만 가능했다는 점과 1982년 금융위기, 불평등을 두고 평가가 갈린다.

상세

시카고 보이스는 누구인가?

시카고 보이스는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나 그 제휴 대학인 칠레 가톨릭 대학에서 공부한 칠레 경제학자 집단을 가리키는 별명이다. 가장 이름난 인물은 1975년 경제 장관이 되어 1982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낸 세르히오 데 카스트로이고, 연금 민영화를 설계한 호세 피녜라는 하버드 출신이지만 흔히 함께 꼽힌다. 이들의 스승은 통화주의를 세운 밀턴 프리드먼과 그의 제자 아널드 하버거였다. 같은 이름은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지의 시카고 출신 경제학자들에게도 넓혀 쓰인다.

그들의 생각은 간단히 말해 시장에 맡기면 자원이 가장 잘 쓰이고, 국가의 경제 계획과 복지 국가는 그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칠레에서 이 생각은 1970년대 초까지 정치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었다.

미국은 왜 칠레 학생들을 시카고로 보냈나?

시작은 1950년대 미국의 원조 정책이었다. 국무부가 트루먼의 포인트 포 계획 아래 “칠레 프로젝트”를 꾸렸고,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이 돈을 댔다. 칠레 경제 사상을 바꾸는 것이 목적이었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선발된 칠레 학생 126명이 칠레에서, 이어 시카고 대학원에서 훈련을 받았다. 1959년 쿠바 혁명 뒤에 이 사업은 서반구에서 미국이 벌이는 냉전 전략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쿠데타 뒤 어떻게 경제를 맡았나?

1969년 대선을 앞두고 이들 가운데 몇몇이 경제 청사진을 만들었고, 호르헤 알레산드리 후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구상은 살바도르 아옌데 집권기에 사적인 세미나에서 이어져 1973년 쿠데타 몇 주 전 벽돌처럼 두껍다는 뜻의 『엘 라드리요』로 완성되었다. 1975년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 보고서는 이 칠레 경제 계획이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협력해 준비되었다고 밝혔다.

쿠데타 직후에도 피노체트가 이 노선을 택할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1975년 3월 칠레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 가운데 프리드먼과 하버거가 칠레를 찾았다. 프리드먼은 피노체트를 직접 만났고, 4월 21일 편지에서 인플레이션을 끝내는 길은 통화량 증가를 과감히 줄이는 것뿐이고, 재정 적자를 줄이는 데는 정부 지출 삭감이 단연 바람직하다고 썼다. 피노체트는 곧 큰 실업을 각오한 “충격 요법”을 발표하고 데 카스트로를 경제 장관에 앉혔다.

무엇을 바꾸었나?

칠레 인민연합 정부와 1973년 쿠데타 이후의 군정은 물가 안정, 경제 자유화, 공기업 민영화를 세 축으로 삼았다. 관세를 10%까지 내려 칠레 기업을 수입품과 경쟁시켰고, 은행과 국영 기업을 팔았으며, 중앙은행을 독립시키고 세금을 낮췄다. 다만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 회사 코델코는 정부 손에 남았다.

사회 제도도 바뀌었다. 피녜라는 1979년 노동법을 고쳤고, 1980년 11월 4일에는 공적 연금을 민간 운용 개인 계좌 제도로 바꾸었다. 1980년 헌법은 공공 부문 노동자의 파업을 금지하고, 시장이 맡을 수 있는 일은 국가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박아 넣었다. 교육도 민영화 쪽으로 움직였다.

“칠레의 기적”은 실제로 어떠했나?

1982년 프리드먼은 “칠레의 기적”을 선언했다. 인플레이션은 1974년의 600% 이상에서 1982년 위기 직전 10%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바로 그 뒤 위기가 왔다. 데 카스트로는 프리드먼의 변동 환율 지지와 달리 1979년 6월 페소를 달러당 39페소로 고정했다. 칠레 물가가 미국보다 빨리 오르면서 페소는 고평가되고 무역 적자가 커졌으며, 해외 대출은 1981년 말부터 줄어 1년 뒤에는 거의 끊겼다. 1982년 칠레의 국내총생산은 14.3% 줄고 실업률은 23.7%에 이르렀다. 1983년 1월 13일 정부는 은행 다섯 곳을 구제하고 세 곳을 해산했다. 이 대목에서 군정은 은행 규제 완화를 되돌렸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 등은 1975~1982년 “순수 통화주의 실험”의 순성장이 작았고, 1982년 은행 위기 뒤 국가가 아옌데 때보다 더 많은 경제를 쥐게 되었다는 점을 들어 이 경험을 경제적 자유주의의 실패로 본다. 지속적인 성장은 1985년 에르난 뷔치가 재무장관이 된 뒤의 개혁에서 왔다는 설명이 따른다. 빈곤은 여전히 심각해 1988년 칠레인 48%가 빈곤선 아래에 있었고, 2000년에는 20%로 줄었다. 군정이 끝난 뒤의 중도 좌파 연합은 성장과 형평을 내걸고 노동권과 사회 프로그램을 되살렸지만, 헌법과 시장 중심 틀은 대부분 그대로 두었다.

입장은 어떻게 갈리나?

프리드먼은 자신이 피노체트의 자문은 아니었다고 했고, 시장 자유가 정치적 중앙집권을 약화시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옹호했다. 이 계통의 경제학자 세바스티안 에드워즈는 2023년 저서 『칠레 프로젝트』에서 개혁을 오늘날 칠레의 상대적 번영과 연결하면서도, 1975년 충격 요법의 실업이 예상보다 컸고 피노체트 17년의 성과가 “인상적이지 않다”는 점은 인정한다. 비판자 빈센트 베빈스는 민영화가 정권 측근에게 국가 자산을 헐값에 넘기는 일이었다는 에드워즈의 시인을 짚는다.

아옌데 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오를란도 레텔리에르는 1976년 《더 네이션》에 쓴 글에서, 다수에 대한 억압과 소수 특권층의 “경제적 자유”는 칠레에서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그는 워싱턴 한복판에서 살해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칠레를 “신자유주의 국가 형성의 첫 실험”으로 보고, 이 사례가 영국과 미국의 전환에 도움이 되는 증거를 주었다고 분석한다. 이 시기 칠레 야권 학자들이 군정의 개혁을 비판하며 쓰면서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오늘의 뜻을 얻었다. 이 정책은 뒤에 레이건과 대처 정부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자유주의 전환에서 그 뒤를 볼 수 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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