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조주의자 (소글라샤텔리)
Compromisers (Soglashateli)
1917년 러시아 혁명기 볼셰비키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 다수파를 가리켜 쓴 정치적 낙인으로, 부르주아지·지주와의 합의를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배반하는 사회주의자라는 뜻이다. 레닌은 1917년 6월 제1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쟁 중지와 소비에트로의 전권 이양을 요구한 볼셰비키 결의를 부결시키고 임시정부를 지지한 멘셰비키·SR 다수파를 이 말로 규정했다. 동시대 사전은 이 말이 외래어 '기회주의자(оппортунист)'를 대체한 러시아 혁명의 어휘라고 설명하며, 1905년 혁명 당시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주장한 멘셰비키의 노선에도 소급해 적용했다. 협조주의는 단순한 정치적 이견이 아니라 계급 투쟁을 자본가와의 협상으로 대체하는 배신적 경향으로 규정되었다.
상세
역사
협조주의자라는 낙인이 등장한 배경은 1917년 4월 위기다. 이 위기 끝에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참여하는 최초의 연립 임시정부가 성립했고, 볼셰비키는 이 협력을 훗날 '협조주의'라고 규정했다. 1917년 6월 3일부터 7월 7일까지 열린 제1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사회혁명당·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했다. 당적을 밝힌 대의원 777명 가운데 사회혁명당 285명, 멘셰비키 248명, 볼셰비키 105명이었고, 볼셰비키는 당적을 밝힌 대의원의 13.5%에 그쳤다. 대회가 선출한 320명의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도 멘셰비키 123명, 사회혁명당 119명, 볼셰비키 58명 구성이었으며 의장은 멘셰비키 니콜라이 치헤이제였다.
대회에서 사회혁명당·멘셰비키 다수파는 전쟁 중지와 소비에트로의 전권 이양을 요구한 볼셰비키 결의를 부결시켰고, 이 때문에 레닌에게 '협조주의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같은 달 협조주의자들의 요구로 대회는 예정된 6월 10일(그레고리력 6월 23일) 볼셰비키 시위를 금지했고,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대회 결정에 따랐다. 그러나 인민의 신뢰 상실을 두려워한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지도부는 6월 18일(7월 1일) 시위를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라는 구호 아래 허용했고, 협조주의자들의 예상과 달리 약 50만 명이 '전권을 소비에트로!', '10명의 자본가 장관을 타도하자!'라는 볼셰비키 구호 아래 행진했다.
7월 사건 이후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봉기 참가자들에 대한 탄압 조치를 지지했고, 볼셰비키 공격에는 레닌을 독일 스파이로 몰아가는 허위 고발도 포함되었다. 1923년 《대중정치사전》은 이 말을 혁명 어휘의 살아 있는 범주로 설명하면서, 협조주의자들이 연립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영국·프랑스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라 6월 전선 공세를 조직했으며 10월에는 봉기한 노동자·농민에 맞서 자본가들과 함께 싸웠다고 적었다. 같은 사전은 서유럽에서 이들이 독일·헝가리 혁명을 진압하는 부르주아지를 도왔다고 덧붙인다.
구별
협조주의자라는 말은 '타협' 일반과 구별된다. 레닌은 1917년 9월 1~3일(그레고리력 9월 14~16일)의 《타협론》에서 타협을 다른 당과의 합의로 요구 일부를 양보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혁명가가 원칙적으로 타협을 거부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블랑키주의의 '타협은 없다!'에 반대한 엥겔스의 논의를 인용하고, 제3·제4 국가두마 참여처럼 상황이 강요한 타협과 자신이 제안하는 자발적 타협을 구별했다. 자발적 타협은 '예외적으로' 그리고 주요 계급 적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상대'인 사회혁명당·멘셰비키 블록에 대해 제안되었다.
이 제안조차 투항과 같지 않았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독재'가 실현되지 않는 한 그런 정부에 볼셰비키가 참여할 수 없다고 못 박았고, 완전한 선전의 자유와 제헌의회 소집을 합의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말의 적용 범위에도 한계가 있다. 협조주의자라는 낙인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 대한 당 간 투쟁의 어휘에 속한다. 1917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에게 레닌은 '파업파괴(штрейкбрехерство)'라는 비난을 퍼부었고, 검토한 사료 어디에도 이들을 '협조주의자'라고 부른 용례는 없다.
사례
1923년 사전이 든 사례로는 연립 임시정부 지지, 영국·프랑스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른 6월 전선 공세 조직, 10월에 자본가들과 함께 봉기한 노동자·농민에 맞선 무장 투쟁, 그리고 독일·헝가리 혁명 진압에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원조가 있다. 1917년의 사례로는 예정된 6월 10일 볼셰비키 시위 금지와 6월 18일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 구호 아래 치른 시위가 있으며, 후자는 볼셰비키 구호 아래 약 50만 명이 행진하면서 협조주의자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Russian Wikipedia, Июльские дни: Lenin coined 'соглашатели' at the First All-Russian Congress of Soviets when the Menshevik-SR majority rejected Bolshevik resolutions on ending the war and transferring power to the soviets —
- Russian Wikipedia, I Всероссийский съезд Советов: delegates rejected Bolshevik resolutions 'за что были названы Лениным «соглашателями»' —
- V. I. Lenin, On Compromises (September 1917): Lenin's theoretical treatment of compromise in revolutionary politics, distinguishing forced from voluntary compromises and explaining the Bolshevik critique of the Menshevik-SR bloc —
- Популярный полит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1923), entry 'Соглашатели': defines the term as the Bolshevik label for Mensheviks and SRs who 'betray the interests of the working class and peasants to please agreement with capitalists and landowners,' and notes it replaced the foreign word 'opportunist' —
- 위키백과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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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pular_political_dictionary.academic.ru
- dic.academic.ru
- 위키백과 (러시아어)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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