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 내부 모순
Contradictions among the people
마오쩌둥이 1957년 2월 27일 최고국무회의 연설 「인민 내부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에서 체계화한 개념. 사회주의 사회에도 모순이 남아 있으며, 적과 우리 사이의 적대적 모순과 달리 인민 내부의 비적대적 모순은 강압이 아니라 민주적 방법, 설득과 교육, 「단결·비판·단결」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백화제방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으나, 1957년 6월 공개된 수정본의 여섯 기준은 반우파 투쟁에서 비판자를 적과의 모순으로 돌리는 잣대가 되었다.
상세
연설은 두 모순을 이렇게 갈랐다.
在我们的面前有两类社会矛盾,这就是敌我之间的矛盾和人民内部的矛盾。这是性质完全不同的两类矛盾。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사회적 모순이 있다. 적과 우리 사이의 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이다. 둘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마오는 「인민」의 범위가 시대마다 달라지며, 사회주의 건설을 지지하는 계급과 집단은 모두 인민에 속한다고 했다. 노동계급과 민족 자산계급 사이의 모순도 다루기에 따라 인민 내부의 모순이 될 수 있었다. 해결의 방법으로 내세운 「단결·비판·단결」은 1942년 옌안 정풍에서 교조주의자를 다룬 방식을 일반화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에도 생산력과 생산관계, 상부구조와 토대 사이의 모순이 남는다는 인정은 「모순 없는 사회」를 내세운 소련 교리와 다른 중국 독자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졌고, 1937년의 「모순론」을 사회주의 시기로 넓힌 것으로 평가된다.
연설은 녹음으로 전달되어 지식인과 민주당파의 「대명대방」을 불렀다. 그러나 6월 19일 《인민일보》에 실린 수정본에는 2월에 없던 여섯 기준, 곧 말과 행동이 민족 단결, 사회주의 개조와 건설, 인민민주독재, 민주집중제, 공산당의 영도, 사회주의의 국제 단결에 이로운가가 덧붙여졌고, 마오는 그 가운데 사회주의의 길과 당의 영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반우파 투쟁은 우파와 인민의 모순을 적과의 모순으로 규정했고, 당은 뒤에 이 판단이 처벌을 지나치게 무겁게 만들었다고 인정했다.
1961~1962년의 조정기에 문예·과학 정책은 다시 이 여섯 기준을 경계선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