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рымская (Севастопольская) эвакуация · 1920.11.13–16

크림 철수 (1920)

Evacuation of the Crimea (1920)

1920년 11월 13~16일 붉은 군대가 페레코프를 뚫자 브란겔의 러시아군과 이를 따르는 주민이 세바스토폴, 얄타, 페오도시야, 케르치 등 크림의 항구에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난 철수. 126척의 배에 승무원을 빼고 약 14만 6천 명이 실려 나갔다. 노보로시스크 때와 달리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 있게 치러졌지만, 러시아 유럽 지역에 백군이 차지한 땅이 더는 남지 않은 채 나라 밖으로 떠난 것이었다. 남은 장교와 병사, 주민 다수는 뒤이은 크림의 적색 테러에 희생되었다.

상세

11월 11일 남부전선 사령관 프룬제는 무선으로 브란겔에게 저항을 멈추면 무기를 내려놓는 이들을 사면하겠다고 제안했다. 레닌은 곧바로 “조건이 터무니없이 너그러운 데 몹시 놀랐다”며 함대를 반드시 손에 넣고 배 한 척도 내보내지 말아야 하고, 적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조건을 되풀이하지 말고 “가차 없이 처리해야 한다”고 전보를 쳤다. 같은 날 브란겔은 군과 고난을 함께한 이들, 군인과 관리의 가족, 적이 오면 위험해질 사람들을 실어 내라는 철수 명령을 내렸고, 남러시아 정부는 위험하지 않은 사람은 크림에 남으라고 권하는 포고를 냈다. 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제1·2군단과 바르보비치의 기병군단은 세바스토폴과 얄타로, 제3군단과 돈·쿠반 군단은 케르치와 페오도시야로 향했다. 14일 세바스토폴에서 배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붉은 군대는 배들이 이미 정박지에 나간 뒤 도시에 들어왔으며, 15일 얄타, 16일 케르치에서 마지막 배가 떠났다. 함대 사령관 케드로프 제독이 실무를 맡았고, 프랑스 순양함 발데크루소가 마지막으로 떠나며 엄호했다.

항구별로는 세바스토폴 약 6만 5천, 얄타 약 1만 3천, 페오도시야 약 3만, 케르치 3만 2천여 명이라는 다른 집계도 있다. 슬라시초프와 오볼렌스키 같은 목격자는 철수가 무질서와 공황 속에 이루어졌다고 썼고, 페오도시야와 케르치에서는 배가 모자라 아스트라한과 테레크 카자크 일부가 남겨졌다. 항해 중 15일 폭풍에 구축함 지보이가 250명을 태운 채 가라앉았다. 콘스탄티노플에 이른 군대는 무장 해제되어 갈리폴리(제1군단), 차탈자(돈 카자크 군단), 렘노스섬(쿠반 카자크)의 수용소로 갔고, 함대는 1920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 튀니지의 비제르트로 옮겨 갔다. 11월 2일 트로츠키는 크림이 “마지막 백군의 무덤”이 되어야 한다고 썼고, 남은 이들은 퍄타코프의 지휘 아래 쿤 벨러와 제믈랴치카가 벌인 적색 테러를 겪었다. 처형된 사람 수는 영어 출처에 따르면 최소 1만 2천 명에서 5만 명, 12만 명까지 추산이 엇갈린다. 소비에트 역사서술은 흔히 이 철수를 내전의 끝으로 그렸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영문)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