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카자크화
De-Cossackization
러시아 내전기와 그 뒤 볼셰비키 정권이 카자크, 특히 돈·쿠반 카자크를 하나의 집단으로서 없애려 한 체계적 탄압 정책. 1919년 1월 24일 당 조직국의 비밀 지시가 부유한 카자크와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모든 카자크에 대한 「대량 테러」를 명령했다. 처형과 강제 이주는 3월 돈 강 상류의 뵤셴스카야 봉기를 불러 붉은 군대 남부전선의 후방을 묶었고, 3월 16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정책 집행을 멈추게 했다.
상세
지시는 「부유한 카자크에게 대량 테러를 가해 그들을 모두 절멸하고, 소비에트 권력과의 싸움에 직간접으로 가담한 모든 카자크에게 가차 없는 대량 테러를 가하라」고 명령했고, 2월 7일 남부전선은 스타니차 아타만을 무조건 처형하라는 시행 지침을 냈다. 3월 중순에만 체카가 8천 명 넘는 카자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돈 강 상류에서는 혁명재판소가 처형 명단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미 300명가량이 총살되자 3월 11일 파벨 쿠디노프를 지도자로 한 봉기가 일어나 약 3만 명의 봉기군이 비슷한 수의 붉은 군대를 붙잡아 두었다. 봉기군은 6월 뵤셴스카야에서 돈군과 합류했고, 데니킨의 모스크바 진격은 이 틈에서 시작되었다. 지시의 작성자와 오르그뷰로 의사록의 진위는 러시아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고,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소콜니코프의 문제 제기가 3월 16일 중단 결정을 이끌었다.
중단 뒤에도 탄압은 지역에 따라 이어졌다. 1920년 크림 탈환 뒤 탈카자크화 특별위원회는 10월 한 달에만 6천 명 넘게 사형을 선고했고, 테레크에서는 4만 5천 명 넘는 카자크가 추방되었다. 희생자 수는 수천 명에서 수십만 명까지 크게 엇갈린다. 홀퀴스트는 1919~1920년 사망자를 수천에서 수만 명으로 보면서 지역 차가 컸다고 지적하고, 젤러틀리는 30만~50만 명이 죽거나 추방되었다고 추산한다. 일부 연구자는 이를 제노사이드로 분류하지만, 수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이 분류에 반대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영어 출처는 정책의 시기를 1919~1933년으로 넓게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