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탈영대책위원회
Central Commission for Combating Desertion
러시아 내전기에 붉은 군대의 탈영과 징집 기피를 단속하려고 1918년 12월 말 노농국방회의 아래 세운 중앙 기관. 전러시아 총참모부, 전러시아 군사위원국, 내무인민위원부 대표로 이루어졌고, 각 현과 군에 지방 탈영대책위원회를 두었다. 이 항목은 내전기 탈영 문제와 소비에트 정부의 대책 전체를 함께 다룬다.
상세
탈영 문제는 1918년 5~6월 처음으로 의무 징집을 실시하면서 시작되었다. 트로츠키는 『나의 생애』에서 칼루가·보로네시·랴잔 현에서 수만 명의 젊은 농민이 첫 소집에 나오지 않았고 “나오지 않은 이들을 탈영병이라 불렀다”고 회고했다. 1919년 9월 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설에서는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병역 소집에 응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다”라고 덧붙였다. 전선에서는 1918년 8월 스비야시스크의 명령 제18호가 원칙을 세웠다. “어느 부대든 멋대로 물러나면 맨 먼저 그 부대의 정치위원이, 다음으로 지휘관이 총살될 것이다.” 노농국방회의는 「탈영에 관하여」, 「탈영 대책에 관하여」, 「탈영 근절 대책에 관하여」 결정에서 탈영을 반역과 같은 가장 무겁고 수치스러운 범죄로 규정했고, 중앙 위원회와 지방 위원회는 당원과 붉은 군대 병사로 순찰대를 꾸려 가택 수색과 일제 단속을 벌였다. 탐보프 현에서는 체신 인민위원 바딤 포드벨스키가 위원으로 내려왔고, 순찰대에는 「특별한 경우」 총살할 권한이 주어졌다. 탈영병을 숨겼다고 의심되는 마을에서는 인질을 잡고 벌금·가축 몰수·가옥 방화까지 가했다.
강제와 함께 사면도 썼다. 1919년 6월 탈영병 사면이 선포되어 한 달 동안 순찰대가 4만 4천 명을 잡아들이고 15만 6천 명이 스스로 나왔으며, 돌아온 이들은 「악의적」 탈영병과 「의지가 약한」 탈영병으로 나뉘었다. 트로츠키는 랴잔에서 1만 5천 명의 “탈영병 동지들” 앞에서 한 시간 반 연설했고 “랴잔 ‘탈영병’들로 만든 연대들은 뒤에 전선에서 잘 싸웠다”고 썼으며, 1919년 2월 24일에는 “탈영병 3천 명을 주고 연대라 부르라. 내가 지휘관과 정치위원을 붙여 주면 탈영병 3천 명은 4주 안에 훌륭한 연대가 된다”고 말했다. 규모를 두고 출처는 엇갈린다. 영어 출처는 1919년 징집 기피자와 탈영병 83만 7천 명 가운데 「상습」 탈영병 612명(다른 문서는 616명)이 처형되었고 사면 주간에 9만 8천~13만 2천 명이 자진 복귀했다고 적고, 체카 특별위원회가 1919년 50만 명, 1920년 60만~80만 명을 잡았다고도 쓴다. 러시아어 출처는 1919년 6월부터 1920년 6월까지 최대 260만 명이 탈영했다고 적는다. 숲으로 들어간 탈영병은 「녹색군」 농민 봉기의 주력이 되었다. 1920년 12월 군 감축을 보고하며 트로츠키는 무단 이탈을 계속 탈영으로 엄벌하되 노동 전선에 제때 나오는 기피자·탈영병은 형사 책임을 면한다고 밝혔고, 아스트라한 현 위원회처럼 지방 위원회는 1921년 말까지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