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발전의 발전
Development of underdevelopment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1966년 같은 제목의 논문에서 내놓은 명제. 저발전은 자본주의 이전의 낡은 구조가 남아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중심부(메트로폴리스)를 발전시키는 바로 그 과정에서 위성(주변부)에 만들어 낸 결과라는 것이다. 오늘의 선진국은 한때 “미발전”이었을 뿐 “저발전”이었던 적이 없으며, 저발전은 메트로폴리스가 위성의 잉여를 빼앗는 사슬의 산물이라고 본다. 라틴아메리카가 식민지 시기부터 자본주의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져 혁명 전략 논쟁을 불렀다.
상세
미발전과 저발전은 어떻게 다른가?
“저발전”이라는 말은 흔히 아직 덜 발전했다는 뜻으로 쓰인다. 프랑크는 바로 이 상식을 뒤집었다. 그의 생각은 1971년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정리한 네 명제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나라가 같은 단계를 차례로 밟아 발전하며 오늘의 저개발국은 선진국이 오래전에 지나온 단계에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 오늘의 선진 자본주의 나라는 한때 미발전(undeveloped) 상태였을 뿐, 오늘의 가난한 나라와 같은 의미로 저발전(underdeveloped)이었던 적이 없다. 둘째, 오늘의 저발전은 그 나라 자신의 경제·정치·문화 구조를 비춘 것이 아니라 대부분 저발전 위성과 오늘의 선진국 사이 관계가 역사적으로 낳은 산물이다. 셋째, 저개발 사회에는 자본주의에 편입된 근대 부문과 고립된 봉건적·전자본주의적 부문이 따로 움직인다는 “이중 구조”론은 환상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자본주의의 확장은 가장 외진 곳까지 파고들었다. 넷째, 메트로폴리스와 위성의 관계는 국제 수준에만 있지 않고 종속국 안으로도 들어가, 나라 안에 하위 메트로폴리스를 만들고 내륙 지방을 그 위성으로 삼는다.
프랑크는 이렇게 썼다. 메트로폴리스는 “코르테스와 피사로 시절의 멕시코와 페루, 클라이브의 인도, 로즈의 아프리카, 중국의 ‘문호 개방’ 때와 다를 바 없이” 독점 무역으로 그 사회 노동의 열매를 빼내려고 그곳의 기존 사회·경제 체계를 파괴하거나 송두리째 바꾸었고, 그 결과 그 사회의 운명은 “탈자본화,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비생산성, 대중의 끝없이 깊어지는 빈곤, 한마디로 저발전”이었다.
메트로폴리스와 위성의 사슬은 어떻게 작동하나?
프랑크는 잉여가 위에서 위로 끌려 올라가는 사슬을 그렸다. 설명을 위해 단순화한 그림으로 보면, 내륙 농촌의 소작농이 만든 잉여는 지방 도시의 상인과 지주에게, 지방 도시의 잉여는 수도의 수출 상사와 은행에, 수도의 잉여는 런던이나 뉴욕의 상사와 투자자에게 넘어간다. 사슬의 각 고리는 아래로는 메트로폴리스, 위로는 위성이다. 프랑크의 말로 “메트로폴리스는 위성의 경제적 잉여를 빼앗아 자기 경제 발전에 쓴다. 위성은 자기 잉여에 접근하지 못하고, 메트로폴리스가 위성의 국내 구조에 들여와 유지하는 양극화와 착취의 모순 때문에 저발전에 머문다.”
그래서 발전과 저발전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은 서로 다른 경제 구조나 체제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확장하고 발전한 하나의 같은 역사적 과정”이 동시에 낳았고 지금도 낳는 결과라는 것이다. 프랑크는 자본주의의 기원도 15세기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도시에서 이베리아와 서북유럽 도시로 퍼진 세계 “상업망”이 지구 전체를 하나의 상업자본주의 체제로 묶은 데서 찾았다.
정치적으로 무엇이 걸려 있었나?
이 명제는 학술 논쟁에 그치지 않았다. 라클라우가 정리한 대로,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 좌파는 이 대륙 사회가 봉건적인가 자본주의적인가를 두고 크게 나뉘었다. 봉건적이라고 보는 쪽은 이 사회들이 아직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봉건적 정체를 깨뜨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앞두고 있으므로, 사회주의자는 민족부르주아지와 동맹해 과두 세력과 제국주의에 맞선 통일전선을 짜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많은 공산당의 노선이었다. 반대로 라틴아메리카가 식민지 시기에 이미 세계 시장에 완전히 편입되어 처음부터 자본주의였다고 보는 쪽은, 앞으로 올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상정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제국주의와 한 몸이 된 부르주아지에 맞서 곧바로 사회주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 프랑크는 후자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였다. 그는 1962년부터 라틴아메리카에서 지냈고 칠레 대학 교수로 아옌데 정부의 개혁에 관여하다가 1973년 쿠데타 뒤 유럽으로 피신했다.
라클라우와 브레너는 무엇을 비판했나?
아르헨티나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1971년 『뉴 레프트 리뷰』의 「라틴아메리카의 봉건제와 자본주의」에서 두 입장이 겉보기와 달리 한 가지 점에서 같다고 지적했다. 둘 다 “자본주의”와 “봉건제”를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상품 교환의 영역에서 정의해, 시장과의 연결이 있는가 없는가를 두 사회를 가르는 결정적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라클라우는 이것이 봉건제와 자본주의를 무엇보다 생산양식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세계 시장에 곡물이나 은을 팔면서도 강제 노동으로 생산하는 대농장은 교환으로 보면 자본주의적이지만 생산관계로 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미국의 역사가 로버트 브레너는 1977년 「자본주의 발전의 기원: 신스미스주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에서 프랑크와 월러스틴의 방법을 “신스미스주의”라 불렀다. 애덤 스미스는 무역과 분업이 자라면 저절로 경제 발전이 온다고 보았는데, 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낙관을 뒤집어 같은 시장 과정이 주변부에 후진성을 강제한다고 말할 뿐 개인주의적·기계론적 전제는 그대로 둔 “거울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브레너에 따르면 그들은 계급 구조가 한번 자리 잡으면 한 시대 전체의 발전과 저발전을 결정한다는 점, 그리고 그 계급 구조가 시장의 힘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의 결과로 생겨난다는 점을 놓쳤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이 자리 잡지 않으면 확대된 규모의 자본 축적도 없다는 것이 브레너의 요점이다.
이 명제는 어디로 이어졌나?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저발전의 발전을 세계체제론의 구성 요소로 받아들였다. 사미르 아민은 주변부의 정체된 축적과 낮은 임금이 세계적 가치법칙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같은 이름으로 불렀고, 월터 로드니의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개발시켰는가』도 같은 문제의식을 아프리카에 적용했다. 프랑크 자신은 1980년대 이후 세계사로 관심을 옮겨, 세계 체제는 하나뿐이며 늦어도 기원전 4천 년기에 생겨났다고 주장했고, 『리오리엔트』(1998)에서는 그 체제의 중심이 오랫동안 아시아, 특히 중국이었다고 보았다. 이는 근대 세계체제의 출발을 “긴 16세기”에 두는 월러스틴과 크게 다른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