диссидентское движение / disidentství · 1950년대–현재

반체제 운동 (사회주의권)

Dissident movements (socialist countries)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인 이데올로기·정책과 크게 다른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 때문에 체포·수감·정신병원 수용·국외 추방 같은 박해를 받은 사람들의 활동을 이르는 말이다. ‘디시덴트’라는 말은 1960년대 소련과 동유럽에서, 폭력으로 체제와 싸운 이전 세대와 달리 헌법과 법률, 공식 가치에 호소한 반대 운동을 가리키며 쓰이기 시작했다. 사미즈다트·청원·공개서한과 인권 단체가 주된 수단이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헌장 77」, 폴란드의 노동자방어위원회, 중국의 민주의 벽 운동과 『08 헌장』이 대표적이다.

상세

용어와 범위

‘디시덴트’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dissidens에서 왔다. 러시아어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말은 1960년대에 소련과 동유럽의 반대 운동을 가리키며 쓰이기 시작했는데, 이 운동은 앞 시기의 반소·반공 운동과 달리 폭력으로 체제와 싸우지 않고 소련 법률과 공식적으로 선포된 가치에 호소했다. 처음에는 서방에서, 이어서 당사자들 스스로 이 말을 썼다. 1990년부터 연구를 이어 온 ‘메모리알’은 반체제 운동의 공통 원칙을 비폭력, 공개성, 기본권의 ‘사실상의’ 행사, 법 준수 요구로 정리하고, 검열받지 않은 글의 작성, 독립 단체의 결성, 드문 공개 행동을 그 형식으로 꼽았다. 한국어 ‘반체제’는 어느 체제에 대한 반대에도 쓰이지만, 이 항목은 사회주의 국가 안에서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다 박해받은 사람들의 운동만 다룬다. 당내 권력 투쟁의 숙청이나 망명 뒤 국외 비판만으로는 여기에 넣지 않는다.

소련

넓은 반체제 운동의 시작은 1965년 안드레이 시냡스키와 율리 다니엘의 체포·재판과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입에 연결된다. 1965년 12월 5일 헌법 기념일에 수학자 알렉산드르 예세닌-볼핀 등이 모스크바 푸시킨 광장에서 두 사람의 재판 공개를 요구하며 ‘소련 헌법을 존중하라’는 구호를 든 ‘공개성 집회’를 열었다. 1968년에는 인권 침해를 기록한 사미즈다트 소식지 《시사 연대기》가 나탈리야 고르바넵스카야의 편집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8월 25일 붉은광장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진입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다. 1975년 소련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자 1976년 5월 12일 유리 오를로프의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이 결성되었다. 손으로 베끼거나 타자기로 복사한 사미즈다트와 국외 출판물인 ‘타미즈다트’가 정보를 날랐다.

참여자의 생각은 하나가 아니었다. 류드밀라 알렉세예바는 1983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소련에서 왜곡되었다고 본 ‘진정한 공산주의자’(로이 메드베데프 등), 서구식 체제를 지향한 자유주의 서구파, 절충파, 러시아 민족주의자, 발트·우크라이나·캅카스 등의 민족주의자로 갈래를 나누었다. 시온주의 운동, 크림 타타르인의 귀향 운동, 여러 종교 단체의 활동가도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었다. 옐레나 보네르는 이를 무엇보다 ‘공식적 거짓에서 벗어나려는’ 도덕적 운동으로 보았고, 블라디미르 부콥스키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것이 가장 강한 동기였다고 썼다. 1960년대 중반 비판자 다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였고 프라하의 봄에 기대를 걸었으나, 1968년 이후 서구식 체제를 바라보는 이들과 정교·민족주의 쪽으로 갈렸다.

당국은 체제 안에 반대파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이들을 ‘배교자’라 부르고 서방 정보기관의 하수인으로 묘사했다. 1960년부터 러시아 공화국 형법 제70조(반소 선동)가, 1966년부터 제190-1조가 적용되었고, 1956~1987년 이런 조항으로 8,14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해고, 퇴학, 정신병원 수용, 유형, 국적 박탈과 추방도 쓰였고, 1967년부터는 국가보안위원회 제5국이 이 일을 맡았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를 국외에서 출판한 뒤 1974년 국적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었으며,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1980년 재판 없이 고리키로 유배되었다. 1986~1987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주도로 대부분이 풀려났고, 사하로프와 세르게이 코발료프 등은 인민대의원이 되었다.

동유럽

유고슬라비아의 밀로반 질라스는 1954년 국내 지배층을 비판한 뒤 재판을 받았고, 『새로운 계급』(1957)을 국외에서 내고 수감되었다. 동독의 화학자 로베르트 하베만은 1964년 강의에서 교조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통일당에서 제명되고 교수직을 잃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헌장 77」은 1977년 1월 1일자로 정부가 헬싱키에서 약속한 인권과 시민권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1990년 1월까지 1,898명이 서명했다. 바츨라프 하벨과 파벨 코하우트가 글의 큰 부분을 썼으며, 첫 대변인 가운데 한 사람인 얀 파토치카는 1977년 3월 13일 심문 뒤 숨졌다. 서명자 상당수는 옛 공산당원 출신의 좌파 지식인이었고, 즈데네크 믈리나르시, 이르지 하예크, 루드비크 바출리크도 처음 서명자였다. 하벨은 1978년 「힘없는 자들의 힘」에서 ‘탈전체주의’ 체제와 반체제 활동의 성격을 분석했다. 폴란드에서는 1976년 6월 라돔과 우르수스 노동자 시위 뒤 같은 해 9월 노동자방어위원회(KOR)가 생겨 탄압받은 노동자에게 법률·재정·의료 지원을 했다. 야체크 쿠론이 창립자였고 아담 미흐니크가 1977년에 합류했으며, 전쟁 전 폴란드 사회당원, 제2차 세계대전 지하 투쟁 참가자, ‘코만도스’라 불린 학생 운동가 출신 등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 체코 역사가들은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한 「헌장 77」과 달리 폴란드의 연대노조가 대중 운동이 되었다는 점을 대조한다.

중국

1957년 정풍 운동 때 인민대학 학생 린시링은 소련과 중국이 아직 사회주의 민주제와 법제를 갖춘 ‘진정한 사회주의’를 세우지 못했다고 연설했다가 우파로 몰렸다. 문화대혁명 시기 위뤄커는 가정 출신에 따른 차별을 비판한 「출신론」을 썼다가 1968년 체포되어 1970년 3월 5일 처형되었고, 9년 뒤 무죄로 복권되었다. 1978년 11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베이징 시단의 벽에 대자보가 붙은 민주의 벽 운동은 현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참여자 다수는 이를 올바른 마르크스주의를 둘러싼 투쟁으로 보았고, 웨이징성은 「다섯 번째 현대화」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했다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2008년 12월 『08 헌장』은 「헌장 77」에 영향을 받아 303명이 처음 서명했고, 류샤오보는 징역 11년을 선고받은 뒤 201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위키백과 (영문)
  4. cs.wikipedia.org
  5. cs.wikipedia.org
  6. pl.wikipedia.org
  7. sr.wikipedia.org
  8. de.wikipedia.org
  9. zh.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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