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онтрнаступление Восточного фронта (1919) · 1919.04.28–06.20

동부전선 반격 (1919)

Eastern Front counteroffensive (1919)

1919년 4월 말부터 6월까지 붉은 군대 동부전선이 콜차크의 춘계 공세를 꺾고 백군을 우랄 기슭까지 밀어낸 반격. 미하일 프룬제의 남부집단군이 4월 28일 부구루슬란 남동쪽에서 늘어진 서부군의 남쪽 측면을 쳤고, 부구루슬란 작전(4월 28일~5월 13일), 벨레베이 작전(5월 15~19일), 우파 작전(5월 25일~6월 20일)이 잇달아 이어졌다. 붉은 군대는 두 달이 안 되는 사이 350~400킬로미터를 나아갔다.

상세

4월 10일 카잔 회의 뒤 동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는 프룬제의 남부집단군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쳐 올라가 서부군을 깨뜨리라고 명령하고, 제2군과 제3군을 바실리 쇼린의 북부집단군으로 묶어 가이다의 시베리아군을 맡겼다. 프룬제는 부줄루크 일대에 남부집단군 보병과 포병의 3분의 2와 기병 전부를 모아, 220킬로미터 폭에서 4만 2천 명으로 2만 3천 명의 백군을 칠 계획을 세웠다. 4월 22~25일 가야 가이의 제1군이 오렌부르크 북쪽에서 벨로프 집단을 무너뜨리고 백군 제4군단의 남은 병력이 붉은 군대로 넘어오자, 서부군의 후방이 드러났다. 4월 28일 붉은 군대는 부구루슬란 남동쪽에서 백군 2개 사단을 깨뜨렸고, 5월 4일 부구루슬란, 13일 부굴마, 17일 벨레베이를 되찾았다. 5월 초 카메네프 대신 동부전선 사령관이 된 알렉산드르 사모일로가 18일 추격을 멈추게 했으나 프룬제가 반대해 이튿날 추격 명령이 다시 내려졌다. 6월 9일 바실리 차파예프의 제25사단이 벨라야강을 건너 우파를 되찾았고, 6월 16일 서부군은 전선 전체에서 동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북쪽에서도 제2군이 6월 초 사라풀과 이젭스크, 봇킨스크를 되찾았고, 러시아 인구학자 보리스 우를라니스에 따르면 3월부터 6월 사이 동부전선의 백군은 13만 5천 명에서 8만 7천 명으로 줄었다.

반격이 우랄에 이르자 붉은 군대 지도부는 어디까지 쫓아갈지를 두고 갈라졌다. 트로츠키는 『나의 생애』에서 총사령관 바체티스가 “동부전선이 산맥 위에서 겨울을 나기를” 바라며 동쪽의 몇 개 사단을 데니킨이 커지는 남부로 돌리려 했고, 자신도 이 계획을 지지했다고 회고했다. 동부전선 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와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스밀가, 라셰비치는 “콜차크는 이미 크게 깨졌으므로 그를 쫓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겨울 동안 회복할 것이고, 봄이 되면 우리는 동부 작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라고 맞섰다. 중앙위원회는 총사령부에 반대해 카메네프의 손을 들었고, 바체티스는 물러나 7월 초 카메네프가 총사령관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남부전선이 더 위험하다는 자신의 판단은 맞았지만 콜차크군의 상태에 대해서는 동부전선 지휘부가 옳았다며 “중앙위원회의 결정은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인정했다. 동부전선은 남부에 병력을 떼어 주면서도 콜차크를 쫓아 첼랴빈스크를 거쳐 시베리아 깊숙이 나아갔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러시아어)
  4. 위키백과 (러시아어)
  5. 위키백과 (러시아어)
  6.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