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루법 (1850)
Falloux Law (1850)
1850년 3월 15일 공포된 프랑스 제2공화국의 교육법. 교육부 장관을 지낸 정통왕조파 가톨릭 알프레드 드 팔루의 이름을 땄다. 초등·중등 교육을 공립학교와 「자유」(사립) 학교로 나누고, 성직자와 수도회 회원이 따로 자격 없이 가르칠 수 있게 했으며, 주교를 교육 위원회에 앉히고 초등학교를 면장과 본당 신부가 함께 감독하게 했다. 1880년대 쥘 페리 법들이 나올 때까지 교회가 학교에 깊이 관여하는 체제의 바탕이 되었다.
상세
대혁명 뒤로 프랑스 국가는 교육을 갈수록 직접 맡았고, 나폴레옹이 세운 「대학(Université)」이 학교 전체를 감독했다. 가톨릭 쪽은 이 학교들이 계몽사상과 사회주의를 퍼뜨린다고 여겨 구체제처럼 교회가 교육을 이끌기를 바랐다. 1833년 기조 법은 사립 초등학교를 허용했지만 중등·고등 교육은 대학 아래 두었다. 1848년 2월 혁명 뒤 교육부 장관 이폴리트 카르노는 남녀 아이 모두의 의무교육과 국비로 하는 3년 교사 양성을 담은 안을 냈으나, 6월 봉기 뒤 7월 5일 물러나면서 이 안은 묻혔다.
1848년 12월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오딜롱 바로 내각의 교육부 장관에 정통왕조파 가톨릭 팔루를 앉혔다. 팔루는 1849년 1월 4일 카르노 안을 공식으로 거두어들이고, 티에르가 위원장을 맡은 위원회에 새 법안을 맡겼다. 그는 자기 정책을 “교육에는 하느님을, 교회의 머리에는 교황을, 문명의 머리에는 교회를”이라고 요약했다. 법안은 1849년 6월 18일 의회에 나왔고, 팔루가 9월에 사임한 뒤에는 후임 파리외가 이어받았다. 의회는 먼저 1850년 1월 11일 교사를 쉽게 정직·해임하게 한 「파리외 법」을 처리했고, 토론에서 빅토르 위고는 “교회는 교회 안에, 국가는 국가 안에”라며 성직자의 지나친 영향을 비판했다. 법은 3월 15일 399 대 237로 통과되었다.
법은 초등·중등 교육을 공립과 「자유」 학교로 나누었다. 수도회 회원은 바칼로레아가 없어도 성직자이거나 수습 증명서가 있으면 가르칠 수 있었고, 수녀는 주교의 순명 서한 한 장이면 되었다. 학교는 면장과 본당 신부가 함께 감독했고, 주교는 도마다 하나씩 둔 아카데미의 위원회에 당연직으로 앉았다. 고등교육심의회에는 종교 대표 7명(가톨릭 4명)이 들어갔다. 초등 필수 과목에는 읽기·쓰기·셈과 함께 도덕·종교 교육이 들어갔고, 인구 800명이 넘는 코뮌마다 여학교를 두게 했다. 1854~1867년 가톨릭 학교는 75% 늘었다.
쿠데타 뒤 1854년 법이 아카데미를 16개로 줄였지만 법의 뼈대는 남았다. 1880년대 제3공화국의 쥘 페리 법들이 초등교육을 무상·의무로 하고 종교 교육을 뺐으며, 1886년 고블레 법이 팔루법의 제1편과 제2편을 폐지했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이 시기 부르주아지의 입법이 “포도주세를 되살린 법과, 불신앙을 없애는 교육법”으로 요약된다고 비꼬았다. 볼테르주의를 내세우던 오를레앙파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이 자기들의 숙적인 예수회에게 프랑스 정신의 관리를 맡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