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rde nationale · 1789.07–1872.03.14

프랑스 국민방위군 (1789–1872)

French National Guard (1789–1872)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 때 파리에서 「부르주아 민병대」로 만들어져 전국으로 퍼진 시민 민병대. 상비군과 따로 치안과 국토 방위를 맡았고 장교를 선거로 뽑았다. 1830년과 1848년 혁명에는 봉기 편에 섰지만 1848년 6월 봉기는 진압했다. 1870~1871년 파리 포위 중 노동자에게 문이 열려 30만 명 규모로 커졌고, 코뮌의 군대가 되어 「연맹군(fédérés)」이라 불렸다. 코뮌이 진압된 뒤 1872년 3월 14일 해산되었다.

상세

1789년 7월 13일 국민의회는 네케르 해임으로 들끓는 파리에서 「부르주아 민병대」 창설을 선언했고, 이튿날 이 민병대의 무기 찾기가 바스티유 습격으로 이어졌다. 라파예트가 사령관으로 뽑히면서 이름이 「파리 국민방위군」이 되었고, 다른 도시와 농촌에서도 같은 부대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직접세를 내는 「능동 시민」만 받는 유산자의 민병대였고, 대원은 무기와 제복을 집에 두었다가 소집되면 나왔다. 1792년 여름 지방에서 올라온 연맹병(fédérés)이 합류하고 창을 든 시민까지 받아들이면서 혁명의 무장력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국민방위군을 믿지 않아 일부 무장을 해제했지만 1809년과 1814년 국토 방위에 동원했다. 1827년 샤를 10세가 해산했으나 무기를 거두지 않아 그 총이 1830년 7월 혁명에서 다시 나왔다. 1831년 다시 만들어진 국민방위군은 1832년 6월 봉기를 진압하고도 1848년 2월에는 공화파 편에 섰다. 역사가 자이드만은 국민방위군이 질서 쪽에 서면 「폭동」이라 부르고 봉기 쪽으로 넘어가면 「혁명」이 된다고 썼다. 제2제정은 국민방위군을 부차적인 임무에 묶어 두었다.

1870년 9월 공화국 선포 뒤 국방정부는 파리 포위에 맞서 모집을 노동자 계층에 열고, 하루 1.5프랑의 수당과 식량을 주었다. 9월 말 파리 국민방위군은 254개 대대 약 30만 명이 되었고, 장교 선출이 허용되자 플루랑스, 랑비에, 바를랭 같은 혁명가들이 대대장으로 뽑혔다. 1871년 2~3월 대대 대표들이 「국민방위군 공화 연맹」을 만들었고, 그 집행 기관인 중앙위원회가 3월 18일 봉기 뒤 파리를 다스렸다. 이 연맹(fédération)에 든 국민방위군 병사들을 「연맹군(fédérés)」이라 불렀고, 코뮌은 징병제와 상비군을 폐지하고 건강한 남성 시민 전원을 국민방위군으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무장한 파리가 반혁명 음모의 유일한 장애물이었고, 국민방위군이 그 전체가 뽑은 중앙위원회에 최고 지휘를 맡겼다고 썼다. 피의 주간에 연맹군 1만~1만 5천 명이 전투에서 죽거나 처형되었다. 정규군은 군 밖의 대규모 무장력을 꺼렸고, 국민방위군은 1872년 3월 14일 공식 해산되어 지역 예비 연대로 대체되었다. 2016년 프랑스 정부가 테러 대응을 위해 같은 이름의 예비군을 다시 만들었지만, 이 항목은 1789~1872년의 민병대를 다룬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fr.wikipedia.org
  3. fr.wikipedia.org
  4. 위키백과 (영문)
  5. 위키백과 (영문)
  6.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