Грузинское дело · 1922년

그루지야 사건

Georgian Affair (1922)

소련 결성 직전인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지도부가 모스크바의 자캅카스 연방 편입안에 저항하며 벌어진 정치적 충돌이다. 오르조니키제가 그루지야 볼셰비키를 구타한 사건을 조사한 제르진스키 위원회가 그를 두둔하자 레닌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구술하여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사건은 스탈린-오르조니키제 노선의 승리로 끝나 그루지야 온건파 정부가 무너졌고, 연방 구조를 둘러싼 대러시아 국수주의와 민족 자결권의 긴장을 드러냈다.

상세

배경

그루지야는 1921년 2~3월 붉은 군대의 군사 작전으로 소비에트화되었다. 이 작전은 그루지야 출신의 스탈린과 자캅카스 지역위원회(Zakkraikom) 책임자 오르조니키제가 주도했고, 레닌은 국제적 파장과 케말리스트 튀르키예와의 충돌을 우려해 오래 망설인 끝에 1921년 2월 14일 개입을 승인했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주민의 광범위한 반감을 알던 레닌은 그루지야 인텔리겐치아와 농민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선호했으나, 내전기에 상대에게 쓴 수단을 버리기 어려운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필리프 마하라제 같은 온건파는 멘셰비키 반대파에 대한 관용, 당내 민주주의 확대, 점진적 토지 개혁, 무엇보다 모스크바로부터의 그루지야 주권 존중을 주장했고, 오르조니키제와 스탈린은 정치적 반대파 제거와 당 통제의 중앙집권화를 밀어붙였다.

1921년 7월 초 스탈린이 트빌리시를 방문해 민족주의 청산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으나 노동자 집회에서 야유를 받았고, 곧 마하라제를 해임하고 폴리카르프 므디바니를 후임으로 앉히며 간부들에게 "민족주의의 히드라를 짓밟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스탈린은 므디바니와 공공연히 충돌했다.

연방 구성 논쟁

쟁점은 소련에 들어갈 그루지야의 지위였다. 오르조니키제는 1921년 말 다른 그루지야 볼셰비키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를 묶은 자캅카스 연방 구성을 추진했고, 스탈린의 강한 지지 아래 이 연방이 하나의 연방 공화국으로 소련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루지야 중앙집행위원회, 특히 므디바니는 격렬히 반대하며 단일 자캅카스 연방이 아니라 소련의 완전한 연방 공화국으로 가입하기를 원했다. 오르조니키제의 안은 그루지야 당 대회에서 일반 대의원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스탈린과 그 측근들은 그루지야 지도부를 이기적 민족주의, 이른바 '민족 편향주의자'로 몰았고, 그루지야 측은 '대러시아 국수주의'라고 맞받았다. 1922년 10월 21일 므디바니는 모스크바에 오르조니키제를 강하게 비난하는 연락을 보냈고, 같은 날 레닌은 므디바니를 꾸짖으며 스탈린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문을 보내 자캅카스 공화국들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충돌은 1922년 11월 언쟁 도중 오르조니키제가 므디바니 그룹의 한 구성원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루지야 지도부는 레닌에게 오르조니키제 관련 사건을 포함한 온갖 남용의 목록을 제출했다. 제3자 기록에 따르면 그가 구타한 이는 자신을 "스탈린의 당나귀"라고 부른 그루지야 공산주의자 코바히제이다. 10월 19일 자캅카스 지역위원회가 그루지야 공산당 지도부의 한 사람인 오쿠자바를 해임하자, 이에 항의해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가 사퇴서를 제출했다.

레닌의 개입

1922년 11월 말 레닌은 전러시아 체카 책임자 제르진스키를 트빌리시로 파견해 사태를 조사하게 했다. 제르진스키는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에게 동조하여 보고서에서 이들의 활동을 크게 완화해 전달했으나, 그루지야 문제에 대한 스탈린과 그 동맹들의 처신에 대한 레닌의 의구심은 커졌다. 레닌은 국외와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에서 제기될 부정적 반응도 두려워했다. 1922년 12월 말 레닌은 오르조니키제와 스탈린이 비러시아 민족들에게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강요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레닌은 1922년 12월 30일과 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구술했다. 그는 오르조니키제가 물리적 폭력까지 갈 수 있었다는 데 충격을 표하면서 "어떤 도발이나 모욕으로도 그런 러시아식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썼고, 자치화 사업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오르조니키제에게는 모범적 처벌을, "이 모든 진짜 대러시아 국수주의 운동의 정치적 책임"은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에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수민족에게는 관대함을 과하게 베푸는 편이 낫다며 억압민족과 피억압민족의 민족주의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명시한 레닌의 마지막 주요 저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2월 15~16일 레닌의 병세는 악화되어 다시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었고, 중앙위원회는 레닌과 다른 지도부의 접촉을 제한하고 구술 시간을 하루 5~10분으로 묶었다. 1923년 1월 25일 중앙위원회는 제르진스키 보고서의 결론을 승인했는데, 레닌은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보고서 접수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레닌의 문제 제기는 근본적이지 않았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루지야 지도부는 주요 후원자를 잃은 채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함께 소련을 결성하는 자캅카스 연방에 밀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결과와 사후 처리

1923년 1월 25일 정치국 결정은 므디바니와 그 측근들을 직위에서 해임했고, 이는 오르조니키제와 후원자들의 승리로 남았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은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를 끊고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문제를 맡도록 설득하려 했으며 여러 편의 메모를 준비했다는 것이 하나의 설명이다. 그러나 3월 9일 레닌은 세 번째 뇌졸중을 겪었고, 트로츠키는 이 문제로 스탈린과 맞서기를 거부했다. 1923년 4월 제12차 당 대회에서 레닌의 메모는 공개되지 않았고 그루지야 공산주의자들은 고립되었다. 다만 레닌의 말년 저술과 관련 자료의 진위는 스티븐 코트킨 등 일부 연구자가 문제 삼았던 반면, 대다수 역사가는 이 시기 레닌의 주요 저술이 그의 견해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본다.

사건은 그루지야의 노련한 볼셰비키들의 경력에 타격을 주었고, 오르조니키제의 평판도 손상되어 그는 곧 카프카스에서 소환되었다. 므디바니와 측근들은 말직으로 밀려났을 뿐 1920년대 후반까지 적극적으로 공격받지는 않았으나, 이들 대부분은 1930년대 대숙청 시기에 처형되었다. '민족 편향주의자' 패배의 또 다른 주요 결과는 그루지야에서의 정치적 탄압 강화였고, 이는 1924년 8월 무장 봉기와 그에 뒤따른 적색 테러로 이어져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factual base: background, key actors Ordzhonikidze/Stalin vs. Mdivani/Makharadze, Dzerzhinsky commission, Lenin's break with Stalin
  2.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article with details on Ordzhonikidze's temperament, the slap incident with Akaki Kabakhidze, and the Great Russian chauvinism charges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Lenin's primary text 'The Question of Nationalities or Autonomisation' (Dec 30–31, 1922), dictated in direct response to the Georgian affair; condemns Ordzhonikidze's violence and assigns political responsibility to Stalin and Dzerzhinsky
  4. 위키백과 (영문)
  5.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6. 위키백과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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