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uvernement de la Défense nationale · 1870년 9월 4일 ~ 1871년 2월 13일

국방정부 (1870)

Government of National Defence (1870)

1870년 9월 4일 스당 항복 소식에 파리 군중이 공화국을 요구하자 파리 선출 공화파 의원들이 시청에서 세운 제3공화국의 첫 정부. 트로쉬 장군을 수반으로 파브르·강베타 등이 참여해 포위된 파리에서 다섯 달 동안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이어 가다 1871년 1월 28일 휴전에 서명했고, 2월 8일 선거로 뽑힌 국민의회가 티에르를 세우면서 물러났다.

상세

9월 4일 시청에서 강베타가 공화국을 선포한 뒤 정부는 곧바로 프랑스의 모든 업무를 맡아 전쟁을 계속하기로 했다. 구성원은 수반 루이쥘 트로쉬(파리 총독 겸임), 부수반 겸 외무장관 쥘 파브르, 내무장관 레옹 강베타, 전쟁장관 르플로, 해군장관 푸리숑, 재무장관 피카르, 정부 서기 쥘 페리, 교육장관 쥘 시몽, 법무장관 크레미외, 공공사업장관 도리앙과 로슈포르·글레비주앵·가르니에파제스·펠탕 등 무임소 장관이었다. 보나파르트파를 뺀 여러 정파가 들어왔지만 실권은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 보수파에 있었고, 오를레앙파 트로쉬는 「종교와 재산과 가족을 단호히 지킨다」는 약속을 받고 수반이 되었다. 프로이센을 뺀 열강이 며칠 안에 정부를 승인했다는 서술과, 미국과 에스파냐만 곧바로 승인했다는 서술이 나란히 있다. 비스마르크는 파리 사람들만으로 된 정부가 프랑스를 대표하느냐고 물었고, 황제가 포로이고 황후는 망명했어도 법적 퇴위는 없었다는 점을 이용해 나폴레옹 3세를 「정당한 통치자」로 불렀다. 정부는 로마·알제리·식민지의 부대까지 파리로 불러들이고 요새를 보강하고 식량을 쌓았으며, 9월 20일 파리가 포위되자 푸리숑과 크레미외의 대표단을 투르에 두었다. 10월 7일 강베타가 기구로 파리를 벗어나 투르에서 내무·전쟁장관으로서 지방의 전쟁을 지휘했고, 통신이 끊긴 파리와 투르의 두 정부는 서로 상의 없이 움직여 강베타는 점령되지 않은 프랑스의 사실상 독재자가 되었다.

정부는 돌파를 꺼렸고 11월 28일 밤의 「대출격」과 1871년 1월 18일의 출격이 실패하자 파리 여론은 정부를 비난했다. 정부는 국민방위군을 「규율 없는 주정뱅이 떼」로 의심했고, 주민은 국민방위군을 막을 수 없는 힘으로 여겼다. 1월 22일 정부는 트로쉬를 파리 총독에서 해임해 비누아로 바꾸었고(공화국 수반직은 유지), 파브르가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23일의 작은 봉기가 무력으로 진압되어 파리의 분노는 더 커졌다. 1월 28일 파브르는 비스마르크와 휴전·항복 협정에 서명해 2주 안에 2억 프랑, 총 50억 프랑이 넘는 배상, 파리 외곽 요새의 인도를 받아들였다. 투르의 강베타는 29일 전보로 소식을 받고 싸움을 계속하려 했으나 파리에서 기차로 온 외교관들의 설득으로 2월 6일 물러났다. 2월 8일 선거는 보수적인 농촌 의원들을 대거 뽑았고, 베르사유 궁전을 새 의회 소재지로 삼은 국민의회는 티에르를 행정 수반으로 뽑아 2월 13일 트로쉬의 자리를 이었다. 배상을 서둘러 프로이센군을 내보내려 한 새 정부의 재정 법률은 파리 시민을 격분시켜 파리 코뮌으로 이어졌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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