Голодомор · 1932~1933

홀로도모르

Holodomor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덮친 대기근을 가리키는 우크라이나어 낱말. 굶주림을 뜻하는 голод와 몰살을 뜻하는 мор을 합친 말로, 기근 당시가 아니라 1980년대에 자리 잡았다. 강제 집단화와 감당할 수 없는 곡물 공출 할당이 기근을 불렀다는 데는 사실상 이견이 없고, 우크라이나에서만 350만~39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계된다. 다만 이 낱말은 사건과 함께 「우크라이나 민족을 겨냥한 의도적 절멸」이라는 해석까지 담고 있어, 그 해석의 타당성을 두고 학계가 갈린다. 문서고 사료를 다룬 다수 연구는 기근을 카자흐스탄·볼가·북캅카스까지 덮친 전 소련적 재난으로 보고 민족 절멸 계획의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보며, 제노사이드론은 우크라이나 의회와 30여 개국 의회의 결의로 뒷받침되지만 학계에서는 소수 견해에 가깝다.

상세

이 낱말은 어디서 왔나

홀로도모르는 기근을 겪은 사람들이 쓰던 말이 아니다. 소련 당국은 1987년 말까지 기근의 존재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고, 그동안 북아메리카의 우크라이나 이민 사회에서 이 기근을 부르는 이름이 다듬어졌다. голод(굶주림)와 мор(몰살)을 합친 이 낱말은 1980년대에 널리 퍼졌고, 1991년 독립 뒤 우크라이나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래서 이 말은 처음부터 두 가지를 함께 담고 있다. 하나는 1932~1933년에 실제로 일어난 일, 다른 하나는 그 일을 우크라이나 민족을 겨눈 의도적 절멸로 읽는 해석이다. 사실과 해석이 한 낱말에 붙어 있다는 점이, 이 항목의 논쟁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이유의 하나다.

몇 명이 죽었나

인구학 연구는 대체로 우크라이나의 초과 사망을 350만~390만 명으로 본다. 소련 전체로는 1930~1933년에 500만~700만 명 규모다. 같은 시기 카자흐스탄에서는 약 150만 명이 죽어 카자흐인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가 사라졌는데, 비율로만 보면 소련에서 가장 큰 피해였다. 볼가 중·하류, 북캅카스, 서시베리아의 곡창지대도 함께 굶었다. 2003년 25개국이 유엔에 낸 공동 성명은 700만~1,000만 명을 언급했으나, 문서고 자료로 인구를 다시 계산한 연구들은 이 수치를 과대 추정으로 본다.

왜 해석이 갈리는가

의도치 않은 재앙으로 보는 쪽. 로버트 데이비스와 스티븐 휘트크로프트는 『기아의 해』(2004)에서, 스탈린 지도부의 정책은 「그릇되었으나」 기근은 그들이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결과였다고 본다. 마크 타우거는 1932년 수확 자체가 공식 통계보다 훨씬 나빴다는 점(병해, 잡초, 기상)을 강조한다. 아치 게티는 우크라이나인을 민족으로서 절멸시키라는 지시를 담은 문서가 문서고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이들은 공출 할당이 1932년 가을부터 여러 차례 하향 조정되었고 종자·식량 대여가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기근이 민족 경계를 따라가지 않고 곡창지대를 따라갔다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제노사이드로 보는 쪽. 로버트 콘퀘스트의 『슬픔의 수확』(1986)은 기근이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을 분쇄하기 위한 고의적 정책이었다고 주장했고, 라파엘 렘킨은 1953년 강연에서 이를 「소비에트 제노사이드의 전형」이라 불렀다. 최근에는 티머시 스나이더와 앤 애플바움이 1932년 말의 조치들, 곧 마을 블랙리스트, 국경 봉쇄,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역전이 겹친 시점을 들어 우크라이나를 겨눈 의도가 이때 형성되었다고 본다. 다만 콘퀘스트 자신은 만년에 데이비스와의 서신에서, 스탈린이 기근을 「일부러 일으켰다」기보다 막을 수 있었는데도 소련의 이해를 앞세워 방치했다는 쪽으로 표현을 고쳤다.

가운데에 서는 쪽. 안드레아 그라치오지는 기근의 발생은 집단화와 공출의 산물이었지만, 일단 굶주림이 시작된 뒤로는 그것이 우크라이나 농민의 저항과 민족운동을 꺾는 데 선택적으로 이용되었다고 정리한다. 기근의 계급적 차원과 민족적 차원을 함께 붙잡는 이 해석은 오늘날 연구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절충이다.

쟁점은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노렸는가다.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곡물이 굶주리는 마을에서 계속 실려 나갔고, 이동이 봉쇄되었으며, 모스크바가 구호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의회의 결의는 무엇을 정하는가

2006년 우크라이나 최고라다는 홀로도모르를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이후 30개국 이상과 유럽의회가 같은 취지의 결의를 채택했다. 2008년 러시아 국가두마는 「경제·정치적 목표를 위해 국민의 생명을 경시한」 체제를 규탄하면서도 기근의 우크라이나 특수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결의는 의회의 정치적 판단이지 사학사의 결론이 아니다. 특히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 속에서 이 문제는 외교 사안이 되었고, 승인국 수의 증가는 학계의 합의가 아니라 그 외교의 결과에 가깝다. 두 층위를 구분하지 않으면 「30개국이 인정했으니 학계도 그렇게 본다」는 잘못된 추론에 이르기 쉽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Robert W. Davies and Stephen G. Wheatcroft, The Years of Hunger: Soviet Agriculture, 1931–1933 (Palgrave Macmillan, 2004)
  2. Andrea Graziosi, 'The Soviet 1931–1933 Famines and the Ukrainian Holodomor: Is a New Interpretation Possible?', Harvard Ukrainian Studies 27 (2004–2005)
  3. Robert Conquest, The Harvest of Sorrow: Soviet Collectivisation and the Terror-Famine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4. Anne Applebaum, 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Doubleday, 2017)
  5. Mark B. Tauger, 'The 1932 Harvest and the Famine of 1933', Slavic Review 50:1 (1991)
  6. Sarah Cameron, The Hungry Steppe: Famine, Violence, and the Making of Soviet Kazakhstan (Cornell University Press, 2018)
  7. Nicolas Werth, 'The Great Ukrainian Famine of 1932-33' (Sciences Po, Mass Violence and Resistance, 2008)
  8. Oleh Wolowyna et al., 'Regional variations of 1932–34 famine losses in Ukraine', Canadian Studies in Population 4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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