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정평화
Interim Peace (Välirauha)
겨울전쟁을 끝낸 모스크바 강화조약(1940년 3월 12일 서명, 3월 13일 발효)과 계속전쟁 발발(1941년 6월) 사이의 15개월 남짓한 시기를 가리키는 핀란드어 표현이다. 내전이 아니라 무장한 임시 정전 상태에 가까웠고, 소련은 페차모 광권, 한코 병력 통과권, 대통령 후보 거부까지 요구하며 압박을 이어갔고 독일은 무기 금수 해제와 병력 통과 협정으로 핀란드를 끌어들였다. 핀란드는 살파선 축조와 재군비, 피난민 재정착을 진행하면서 독일 편에 서는 쪽으로 기울었다.
상세
정의와 용어
벨리라우하(Välirauha, 스웨덴어 Mellanfreden)는 겨울전쟁을 끝낸 모스크바 강화조약의 발효일인 1940년 3월 13일부터 계속전쟁이 시작된 1941년 6월 24~25일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15개월 남짓한 이 기간은 전쟁과 평화의 어느 쪽도 아닌 상태였다. 핀란드 사료는 종전 직후 지도부가 이미 이 평화가 잠정적일 것이라고 의심했다고 전한다.
용어의 유래는 확정되지 않았다. 영문 위키백과는 가혹한 강화 조건이 알려진 직후부터 벨리라우하라는 말이 쓰였다고 서술하는 한편, 핀란드어 위키백과는 이 명칭이 기간의 짧음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 역사 연구에서야 쓰이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두 계정은 서로 어긋나며, 확정적 해결은 확인되지 않았다.
역사
전후 처리는 막대한 규모였다. 강화조약으로 핀란드는 영토의 9퍼센트와 산업 능력의 5분의 1을 잃었다. 할양 지역에 살던 주민 가운데 남은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새 국경 너머로 이동했다. 영어권 서술의 피난민 수는 약 42만 명이며, 핀란드어 사료는 약 50만 명과 43만 명으로 서로 다르게 제시한다. 겨울전쟁에서 핀란드는 2만 3천여 명이 전사하고 약 4만 4천 명이 부상했으며, 종전 무렵 전국에 조기가 게양되었다.
소련의 압박은 계속되었다. 새 주재 대사 이반 조토프를 통해 1940년 6월 23일 페차모 광권의 소련 이전 또는 합작 경영, 6월 27일 올란드의 비무장화 또는 공동 요새화, 7월 9일 한코로의 병력 통과권이 요구되었다. 통과권은 9월 6일 승인되었고 올란드 비무장화는 10월 11일 합의되었으며, 페차모 교섭은 장기간 표류했다. 소련은 통과권 협정을 의회 논의나 표결에 부치지 않고 공표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잠정평화 기간에 소련군의 국경 침범이 여러 차례 있었고, 새 국경에서 최소 212명의 핀란드 군인이 붙잡혀 79명만 돌아왔으며 33명의 행방은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1940년 6월 14일에는 소련 폭격기 두 대가 탈린~헬싱키 항로의 여객기 칼레바를 격추했다.
핀란드의 재무장도 진행되었다. 조약 체결 일주일 안에 구릉선 방어선 살파선 공사가 시작되어 22만 톤 규모의 축성 자재가 동원되었으며, 1940년 군사비는 국가 예산의 45퍼센트에 이르렀다. 만네르헤임은 총사령관으로 남아 재편성을 지휘했다. 1940년 8월에는 독일이 반핵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했고, 8월 18일 괴링의 대표 요제프 펠트옌스가 뤼티, 만네르헤임과 협상하여 핀란드~북부 노르웨이 사이의 병력 통과권을 무기와 물자 공급 조건으로 얻었다. 첫 독일군은 1940년 9월 21일 바사에 도착했고, 협정은 11월 21일 확대되었다.
사례
최대 현안은 피난민 문제였다. 핀란드 의회는 1940년 6월 피카아수투슬라키(신속 정착법)를 제정하여 정착 주민의 토지를 사들여 겨울전쟁 피난민에게 재분배했다. 시행은 1940년 가을에 시작되어 1941년 6월까지 약 1만 3천 호의 신속 정착 농가가 완성되었거나 거의 완성되었다. 계획은 스웨덴어 사용 지역에서 특히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핀란드화 시도로 해석되었고 파시키비는 농업 피난민 배치가 수용 지방자치체의 언어 비율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주택 부족은 표준화된 조립식 주택과 1940년 가을 스웨덴이 기증한 2천 채의 조립 주택으로 일부 완화되었다. 1940년 8월에는 4만 마르카를 넘는 개인 자산에 2~20퍼센트의 누진 자산 이전세가 처음 도입되었고, 식량 배급은 확대되어 1940년 말에는 거의 모든 주식품을 포괄했으며 최악의 시기에는 51종의 배급 카드가 사용되었다. 배급은 1954년에야 완전히 끝났다. 비료 수입과 할양된 경작지, 대피 중 잃은 가축, 1940년 여름의 악천후로 식량 생산은 추산 소요량의 3분의 2에도 미치지 못했고, 핀란드는 독일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구별
가장 흔한 혼동은 1944년 모스크바 정전 협정이다. 핀란드어 사료는 벨리라우하를 1944년 가을에 체결되어 핀란드와 소련의 적대 행위를 끝내고 1947년 파리 강화조약으로 확정될 때까지 유효했던 모스크바 잠정평화협정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적으로 경고한다. 잠정평화가 '잠정'인 까닭은 어느 쪽도 그것이 오래가리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 상태는 해제되지 않았다. 세계대전의 확대, 어려운 식량 사정, 군대의 취약한 상태 때문에 핀란드는 전쟁 상태를 유지했고 검열도 계속되어 강화조약 비판이 억눌렸다. 이러한 전쟁 상태 덕분에 칼리오 대통령은 만네르헤임을 총사령관으로 계속 둘 수 있었다.
관계
이 시기는 겨울전쟁과 계속전쟁 사이에 놓인다. 겨울전쟁은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강화조약으로 끝났고, 핀란드는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계속전쟁에 들어가 잃은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국제법 연구는 겨울전쟁을 소련의 침략 전쟁으로 평가하며, 핀란드가 소련에 맞서 독일의 보호를 구해 독일에 의존하기로 결정했다고 서술한다.
1940년 6월 소련이 발트 3국을 점령하자 핀란드의 위기감은 커졌다. 발트 국가들은 1939년 10월 소련의 군사 요구를 수용했고, 소련군 기지는 1939년 10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주둔했으며, 1940년 6월 17일 점령에 이어 7월의 조작 선거와 그해 여름의 합병이 뒤따랐다. 파시키비는 1940년 7월 22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사태가 참혹하다고 보고했다. 8월에는 소련군의 국경 집결과 공관을 통한 첩보 활동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이른바 1940년 8월 위기가 발생했다.
국내 정치도 재편되었다. 강화조약에 항의해 각료 두 명이 사임하고 뤼티 총리는 즉시 새 내각을 구성해야 했다. 우익 극단주의 이클당을 뺀 모든 정당이 참여해 민족적 합의를 이루었고, 그리펜베르크를 대신해 볼프 비팅이 외무장관이 되었다. 독일의 연이은 승리 속에서 핀란드는 서방 연합국과의 연결이 끊기고 소련의 압박이 이어지자 독일과의 협력을 유일한 대안으로 보았다. 독일의 식량 지원은 가장 심각한 공급난을 덜어주었으나 핀란드를 압박 수단에 노출시켰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full article covering the period: Soviet pressure, German courtship, Finnish rearmament, Petsamo crisis, and road to Barbarossa
- fi.wikipedia.org Finnish-language article confirming the term's origin in historical scholarship and the contemporary suspicion that the peace would be short-lived
- sotiemmeperinne.fi Finnish war heritage site detailing the evacuee crisis, food rationing, Pika-asutuslaki (Rapid Settlement Act), and fortification works
- cifile.org Hannikainen (Brill/Nijhoff) academic article analyzing Finland's path from the Winter War through the Interim Peace into Continuation War under international law
- 위키백과 (영문)
- fi.wikipedia.org
- sotiemmeperinne.fi
- cifil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