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여단
International Brigades
코민테른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한 외국인 의용부대. 1936년 9월 18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결정으로 결성되어 프랑스·이탈리아·독일·폴란드·미국 등 50여 개국에서 약 3만 2천 명이 참전했으며, 마드리드 방어전과 하라마·과달라하라·에브로 전투에서 핵심 전력으로 싸웠다. 기지는 알바세테에 두고 앙드레 마르티가 사령관을 맡았으며, 1938년 9월 후안 네그린 총리가 불개입위원회의 외국군 철수 요구에 호응해 해산을 발표하고 10월 바르셀로나에서 고별 행진을 가졌다.
상세
결성과 조직
1936년 9월 18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국제여단 창설을 결정한 것은 불개입위원회 첫 회의가 열린 지 아흔 전이었다. 각국 공산당이 할당받아 모집한 지원병들은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들어가 10월 13일 알바세테 기지에 도착했고, 공화국 정부는 10월 22일 여단을 정규군 소속으로 인정했다. 편성 기지는 프랑스 공산당 출신의 앙드레 마르티가 지휘하고 루이지 롱고가 감찰관, 주세페 디 비토리오가 정치위원을 맡은 3인 체제가 맡았다. 제11여단을 시작으로 12, 13, 14, 15여단이 차례로 편성되었고, 대대는 국적이나 언어별로 묶였기 때문에 한 나라 출신으로만 짜인 부대는 드물었다. 창설 무렵 스페인에는 이미 노동자 민병대에 합류한 수백 명의 외국인 지원병이 있었고, 직업혁명파의 국제 자원병은 별개의 부대에서 싸웠다.
누가 싸웠고, 어디서 싸웠나
전쟁 기간 국제여단을 거쳐 간 사람은 3만 명 안팎으로 추산되며, 한 번에 전선에 있던 인원은 2만 명을 넘지 못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프랑스인 약 9천 명이었고 독일·오스트리아인 최대 5천 명, 폴란드인과 이탈리아인 각 3천 명, 미국인 2,800명, 영국인 1,800명이 뒤를 이었다. 자원병은 프랑스어권 출신이 다수였고 유대인이 특히 많아 폴란드인 지원자의 절반가량, 미국인 지원자의 3~4할을 차지했으며 폴란드 대대 안에는 유대인 중대가 따로 만들어졌다. 대다수는 공산당원이었지만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당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단은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처음 투입되어 하라마·과달라하라·브루네테·벨치테·테루엘·에브로 전투에 참전했고, 1937년 봄까지는 인민군의 다른 부대보다 앞선 핵심 전력이었으며 여단이 만들어졌다는 소식 자체가 공화국 지지자들의 사기를 높였다. 반면 이들은 가장 취약한 구간에 투입되는 충격 부대여서 손실이 다른 부대보다 컸고, 지원병 다수는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전사자 수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아 알바세테 참모부의 4,575명,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보고의 3,615명, 네그린 총리가 고별 연설에서 언급한 5천 명 등이 서로 다르며, 학계의 추산도 6,500명 안팎에서 1만 명, 많게는 1만 5천 명까지 벌어져 있다.
내부의 규율, 그리고 탄압
여단에 대한 통제는 공산당과 코민테른이 쥐고 있었고, 소련에서 파견된 군사 간부들이 지휘부를 채웠다. 엄격한 군율과 '트로츠키주의자' 색출은 여단 안팎에서 굴절된 형태로 나타났다. 마르티는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의 추궁을 받고 여단원 500명 처형을 명령했다고 시인했지만 이 수치는 논쟁적이다. 여단이 주도한 진압은 아니었으나, 독일 공산당의 보안 조직과 내무인민위원회 요원들은 국제여단 안팎에서 활동하며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 당시 외국인 급진파와 반대파를 체포하는 데 가담했다.
해산과 그 이후
1938년 7월 기준 여단 병력 40,149명 가운데 외국인은 14,175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징집된 스페인인이었다. 한때는 90퍼센트까지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1937년부터 공화국 정부는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제여단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의용병으로 짜인 부대가 '민족 독립 전쟁'을 강조하는 선전과 어긋났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21일 네그린 정부는 국제연맹에서 여단 철수를 일방적으로 발표했고, 10월 28일 바르셀로나의 고별 행진에서 이바루리는 여단을 “그대들은 역사이고, 전설이다”라는 말로 배웅했다. 돌아갈 나라가 없는 망명자들은 스페인 시민권을 받았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자국민이 외국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박탈했다. 전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국제여단 참전자들은 항파시즘의 상징으로 기념되고 요직에 진출했지만,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의 정치 숙청으로 거의 모두가 직위를 잃고 심문을 받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52년 오토 슐링이 처형되기도 했다. 서독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돌아온 참전자들은 경찰의 감시와 취업 거부를 겪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Formation, composition (32,000 volunteers from 53 countries), key battles, disbandment in September 1938, farewell parade in Barcelona, Ibárruri's speech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article confirming formation by Comintern decision of 18 September 1936, role of André Marty, troop composition by nationality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Andy Durgan (International Socialism, 1999): critical analysis of the Brigades as Comintern army, confirms 30,000 volunteers from 53 countries, Comintern decision of 18 September 1936, and the political subordination of the Brigades to Soviet foreign policy objectives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