Иван Грозный · 1944–1958 (1부 1945년 개봉, 2부 1946년 금지 후 1958년 개봉)

이반 뇌제 (영화)

Ivan the Terrible (film)

스탈린의 뜻으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만든 2부작 역사 영화. 1부는 1945년 스탈린상을 받았으나 2부는 이반을 햄릿처럼, 친위대를 쿠클럭스클랜처럼 그렸다는 비판을 받고 1946년 금지되어 감독 사후인 1958년에야 개봉했다. 스탈린 찬가인지 스탈린 비판인지 지금도 논쟁이 이어진다.

상세

무슨 이야기인가?

1547년, 열일곱 살의 모스크바 대공 이반이 전 러시아의 첫 차르로 즉위한다. 그는 나라 밖의 적과 나라 안의 적, 곧 보야르를 치겠다고 선언한다. 숙모 예프로시냐 스타리츠카야는 자기 아들 블라디미르를 왕좌에 앉히려 한다. 혼례 잔치에 말류타 스쿠라토프가 이끄는 군중이 몰려들고, 카잔이 선전포고하자 이반은 원정에 나서 땅굴에 화약을 채워 성을 무너뜨린다. 돌아오는 길에 이반이 병으로 쓰러지자 보야르들은 아기 황태자에게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벗이던 쿠릅스키 공은 저울질하다 서쪽으로 보내진다.

예프로시냐가 독이 든 잔을 침실에 슬쩍 놓아 둔다. 쿠릅스키가 리보니아에 투항했다는 소식에 아내 아나스타시야가 충격을 받자, 이반은 곁에 있던 그 잔을 건네 모르는 채 아내를 죽인다. 그는 이것이 하느님의 벌이 아닌지 묻지만, 바스마노프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오프리치니키를 꾸린다. 1564년 그는 모스크바를 떠나 있다가 민중의 행렬을 맞이하며 돌아간다. 1부의 끝이다.

2부 “보야르의 음모”에서 이반은 땅을 나누어 오프리치니나를 세운다. 옛 친구 콜리초프가 모스크바 수좌대주교 필리프가 되어 처형당할 이를 변호할 권리를 얻지만, 말류타는 그가 나서기 전에 그의 친척들을 죽인다. 대성당에서 신성극이 벌어지는 동안 필리프가 이반을 꾸짖고, 한 아이가 이반을 가리켜 “무서운 이교도 왕이냐”고 묻자 이반은 그렇다면 그렇게 되겠다고 선언한다. 보야르들은 젊은 수련 수사 표트르 볼리네츠에게 암살을 맡긴다. 이반은 잔치에서 술에 취한 블라디미르에게 음모를 듣고, 그에게 황제의 옷을 입혀 절한다. 이 잔치와 춤, 그리고 이반의 마지막 연설만이 컬러다. 잔치가 끝나고 블라디미르는 차르의 옷을 입고 대성당으로 들어가 암살자의 칼에 맞는다. 아들의 시신을 본 예프로시냐는 미쳐 버리고, 이반은 안의 적이 모두 사라졌으니 밖의 적과 싸우겠다고 말한다.

왜 스탈린이 이반을 원했나?

이반 4세는 러시아 역사학에서 대체로 나쁘게 그려졌으나, 스탈린은 그를 “위대하고 현명한” 통치자로 보며 근대 러시아 국가의 창건자로 복권하려 했다. 1941년 1월 영화 주문이 내려왔고, 안드레이 즈다노프와 이반 볼샤코프가 예이젠시테인을 골랐다. 대본은 스탈린이 직접 승인했다. 같은 계열의 영화로 예이젠시테인의 전작 《알렉산드르 넵스키》(1938)가 있었다.

전쟁이 나서 촬영은 1943년 4월 알마아타로 옮겨 시작되었다. 볼샤코프는 그가 아파 쉬는 날에도 조수에게 찍게 하라고 재촉했다. 이반 역의 니콜라이 체르카소프는 극단적인 자세를 오랫동안 견뎌야 했고, 음악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맡았다. 프세볼로트 푸돕킨이 성 바보 니콜라를 연기했다. 2부 끝의 컬러 장면은 포츠담 회담 기록 영화의 붉은색에 감탄한 예이젠시테인이 독일에서 가져온 아그파컬러 필름으로 모스크바에서 찍었다.

2부는 왜 금지되었나?

1부는 1945년 1월 개봉해 1등급 스탈린상을 받았다. 1946년 2월 제출된 2부는 사정이 달랐다. 이반 피리예프는 오프리치니키를 “16세기 파시스트”라 불렀고, 알렉산드르 도브젠코는 “이런 영화는 우리에 대한 환상적인 선동이 될 수 있다”고 했다고 전한다. 스탈린은 이 영화를 “악몽”이라 불렀다. 3월 5일 금지 결정이 내려졌고, 1946년 9월 4일 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의 결정 「영화 《위대한 삶》에 관하여」는 진보적인 오프리치니키를 쿠클럭스클랜 같은 패거리로, 강한 의지의 이반을 햄릿 같은 인물로 그렸다고 비판했다. 즈다노프시나의 한 장면이다.

예이젠시테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심근경색으로 병상에 있던 그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고, 1947년 2월 체르카소프와 함께 크렘린에서 스탈린, 몰로토프, 즈다노프를 만났다. 그 대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스탈린은 이반의 잔혹함에 대한 민족적 정당화가 부족하다며 고쳐 다시 만들 것을 허락했다. 예이젠시테인은 더 손대지 않았다. 그는 1948년 2월 10일에서 11일 사이 밤에 심장 발작으로 쉰 살에 죽었다. 3부는 몇 분의 필름과 대본, 그림으로만 남았다. 미하일 롬이 엘리자베스 1세로 분장한 시험 촬영도 있다. 2부는 1958년 5월 역사학자들이 “소비에트 예술을 해칠 수 없다”고 검토한 뒤 9월 1일에야 개봉했다.

스탈린을 칭송했나, 고발했나?

답이 갈린다. 미하일 롬은 1946년 첫 상영에서 관객들이 이반에게서 스탈린을, 말류타에게서 베리야를, 오프리치니키에게서 내무인민위원부(NKVD)를 보았다고 전한다. 한 회고에 따르면, 왜 이반이 뉘우치느냐는 물음에 예이젠시테인은 “스탈린은 더 많이 죽이고도 뉘우치지 않으니, 이걸 보고 뉘우칠지 모른다”고 답했다. 역사가 조앤 노이버거도 그가 이반의 개혁은 빼고 피비린내 나는 시기에 집중한 점을 들어 이반을 찬양할 뜻이 없었다고 본다.

반대편도 있다.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은 이 영화가 추상적인 역사적 목적으로 눈앞의 피를 정당화한다고 썼고, 카테리나 클라크는 스탈린을 나라의 통합자로 높이는 알레고리로 읽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한 인물은 예이젠시테인을 “개처럼 명령을 따른 아첨꾼”이라고 부른다. 《타임》의 평은 그 사이에 있어서, 예이젠시테인은 공포에 항의한다기보다 스탈린이 1943년 러시아의 구원자가 되었다는 끔찍한 역설을 자신에게 설명하려 한다고 보았다. 어느 쪽이든 확정할 증거는 없다.

예술적 평가도 갈렸다. 찰리 채플린은 1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 영화”라 불렀지만 오슨 웰스는 “예쁜 그림의 메마른 전시”라고 했고, 폴린 케일은 인간미가 없다고 평했다.

역사와 얼마나 다른가?

예이젠시테인은 정확성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이반의 협력자였던 수좌대주교 마카리와 실베스트르를 그와 맞서는 필리프와 피멘으로 바꿨고, 쿠릅스키와 아나스타시야의 연정은 지어냈다. 예프로시냐가 아나스타시야를 독살했다는 증거는 없다. 블라디미르는 음독을 강요받아 죽은 것으로 보며, 볼리네츠의 칼에 맞은 일은 없었다. 성 바보 니콜라도 영화의 창작이다. 시클롭스키는 블라디미르에게 황제의 옷을 입혀 절하는 장면이 보야르 표도로프의 처형 전설에서 왔다고 보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