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공세 (1920)
Kiev offensive (1920)
1920년 4월 25일 피우수트스키의 폴란드군이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대와 함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가 5월 7일 키예프를 차지한 공세. 4월 21일의 바르샤바 조약으로 맺은 동맹에 따라 폴란드와 손잡은 우크라이나 국가를 세우려 했다. 5월 말 붉은 군대 남서전선이 반격하고 6월 5일 부됸니의 제1기병군이 폴란드 전선을 뚫자 폴란드군은 키예프를 버렸고, 붉은 군대는 6월 12일 도시에 다시 들어갔다.
상세
러시아어 출처는 우크라이나 쪽 전선에서 폴란드군을 소총 3만 400, 기병 4,900으로, 맞선 붉은 군대 제12·14군을 소총 1만 3,400, 기병 2,300으로 세며, 여기에 페틀류라의 군대 약 1만 5천 명이 더해졌다. 폴란드군은 4월 26일 지토미르를, 27일 베르디치우와 카자틴 철도 분기점을 차지했고, 제12군은 흩어졌지만 일부가 미리 동쪽으로 물러나 전멸은 피했다. 포로 수는 영어 출처가 5월 2일까지 약 2만 명, 러시아어 출처가 2만 5천여 명으로 적는다. 5월 7일 리츠시미그위가 이끈 폴란드군의 기병이 키예프에 들어갔고, 9일 폴란드·우크라이나 군대가 흐레샤티크 거리에서 승전 행진을 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지토미르에서 우크라이나 인민에게 독립과 스스로 정치 체제를 고를 권리를 약속하는 호소문을 냈다. 그러나 이 공세는 프랑스가 바라던 남러시아 백군과의 공동 전선도, 소비에트 쪽 군대의 섬멸도 이루지 못했다.
소비에트 쪽은 5월 14일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이 벨라루스에서 공세에 나서 폴란드군을 북쪽으로 끌어냈고, 예고로프의 남서전선은 캅카스에서 온 제1기병군을 앞세워 5월 말 반격을 시작했다. 리츠시미그위는 키예프를 지키려고 물러나라는 명령을 거부하다 6월 10일 피우수트스키의 서면 명령을 받고서야 드네프르강의 다리와 발전소를 부순 뒤 도시를 버렸다. 6월 9일 폴란드의 스쿨스키 내각이 물러났고, 7월 4일 투하쳅스키의 두 번째 공세가 바르샤바로 향했다. 트로츠키는 『나의 생애』에서 “우리는 진심으로 평화를 원했다. 피우수트스키가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했다”고 쓰고, 폴란드군의 키예프 점령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군사적 의미도 없었지만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라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고 회고했다. 영어 출처는 소비에트 선전이 이 공세를 들어 폴란드 정부를 제국주의 침략자로 그렸다고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