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뇽 협정
Matignon Agreements
1936년 6월 총파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총리 관저 오텔 마티뇽에서 블룸 정부의 중재로 경영자총연합(CGPF)과 노동총동맹(CGT)이 맺은 협정. 임금 7~15% 인상, 단체협약 체결, 노조 가입·활동의 자유, 노동자 대표(델레게) 제도, 파업 참가자 보복 금지를 담았고, 곧이어 의회가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다. 프랑스 노사관계사에서 국가가 중재하는 전국 단위 노사협정의 첫 사례다.
상세
무엇을 합의했나
1936년 6월 7일 저녁, 취임 사흘째의 블룸 총리가 경영자총연합과 CGT의 대표들을 총리 관저로 불렀다. 파업 참가자가 200만에 육박하고 점거된 공장이 수천에 이르던 시점이었다. 다음 날 새벽 1시경 서명된 협정은 짧지만 전례가 없었다. 임금을 낮은 구간 15%에서 높은 구간 7%까지 평균 12% 인상하고, 산업별 단체협약을 체결하며, 노조 가입과 활동을 이유로 한 불이익을 금지하고, 종업원 10인 이상 사업장에 노동자가 뽑는 대표를 두며, 파업 참가자에게 보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협정 자체에는 없던 유급휴가와 40시간제는 며칠 안에 의회가 입법으로 얹었다.
왜 사용자들이 하룻밤에 물러섰나
몇 주 전까지 단체협약조차 거부하던 사용자들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내준 이유는 협상장 밖에 있었다. 공장은 이미 노동자들의 손에 있었고, 파업은 매일 새 업종으로 번지고 있었으며, 경영자 단체는 회원사들의 통제력 상실을 자인하고 정부에 중재를 먼저 요청한 쪽이었다. 사용자 대표 중 한 사람은 훗날 「우리는 공장을 돌려받는 값을 치렀다」고 회고했다. 정부와 CGT, 그리고 공산당까지 질서 있는 복귀를 보증하는 쪽에 섰다는 점도 계산에 들어 있었다. 협정은 혁명의 문턱에서 이루어진 교환이었다. 노동자는 제도를 얻었고, 사용자는 공장을, 국가는 질서를 돌려받았다.
협정 뒤에 무엇이 왔나
단기적으로 협정과 후속 입법은 프랑스 노동자의 일상을 바꾸었다. 그해 여름 60만 명이 생애 첫 유급휴가를 떠났고, CGT 조합원은 100만에서 400만으로 불어났으며, 단체협약의 수는 한 해 만에 수십 배가 되었다. 그러나 되감기도 빨랐다. 물가 상승이 임금 인상분을 잠식했고, 1938년 11월 달라디에 정부의 법령들이 40시간제를 사실상 해체했으며, 이에 맞선 총파업의 패배로 마티뇽 체제의 힘 관계는 2년 반 만에 끝났다.
그럼에도 협정이 만든 틀, 곧 국가가 중재하고 전국 단위 노사 대표가 서명하는 사회적 타협의 형식과 단체협약·노동자 대표 제도는 프랑스 노동법에 남았다. 1968년 5월 총파업을 끝낸 그르넬 협정은 이름의 형식까지 마티뇽을 본떴고, 유급휴가는 이후 3주(1956), 4주(1969), 5주(1982)로 늘며 프랑스적 삶의 일부가 되었다.
관련 용어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Julian Jackson, The Popular Front in France: Defending Democracy, 1934–3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 Jacques Danos & Marcel Gibelin, June '36: Class Struggle and the Popular Front in France (Bookmarks, 1986)
- Antoine Prost, Autour du Front populaire (Seuil, 2006)
- fr.wikipedia.org 협정 조항 원문과 서명 경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