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태환 정지 (닉슨 쇼크)
Suspension of gold convertibility (Nixon shock)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외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가진 달러를 온스당 35달러에 금으로 바꿔 주던 약속을 일방적으로 중단한 조치와, 함께 발표된 90일 임금·물가 동결과 10% 수입 과징금을 묶어 부르는 말. 브레턴우즈 체제를 공식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핵심인 달러의 금 태환을 멈춰 체제를 사실상 끝냈고, 달러를 금에 묶이지 않은 명목화폐로 바꾸었다.
상세
제2차 세계대전 뒤의 국제 통화 질서인 브레턴우즈 체제에서는 각국 통화가 달러에 고정되고, 달러는 온스당 35달러로 금에 고정되었다. 미국은 외국 정부가 내미는 달러를 그 값에 금으로 바꿔 줄 책임을 졌다. 이것을 「금태환」이라 하고, 외국 중앙은행이 달러를 들고 와 금을 받아 가는 창구를 흔히 「금 창구」라고 불렀다. 이 약속이 믿을 만하려면 미국이 가진 금이 외국이 가진 달러를 감당할 수 있어야 했다.
1960년대에 이 전제가 무너졌다. 서유럽과 일본의 수출이 미국과 경쟁하게 되자 미국의 국제수지가 나빠졌고, 해외 원조와 군사비, 베트남 전쟁 비용으로 세계에 풀린 달러가 크게 늘었다. 1966년 미국 밖 중앙은행들이 가진 달러는 140억 달러였는데 미국의 금 보유고는 132억 달러였고, 그나마 외국 보유분에 쓸 수 있는 것은 32억 달러뿐이었다. 1968년 3월에는 금값을 35달러에 붙들어 두던 런던 금 풀이 무너졌다. 1971년 5월 서독이, 8월 9일 스위스가 고정환율에서 이탈했고, 8월 11일에는 체제를 함께 만든 영국마저 30억 달러어치 금을 요구했다.
닉슨은 8월 13일 금요일 오후 캠프데이비드 별장에 재무장관 존 코널리, 연방준비제도 의장 아서 번스, 재무차관 폴 볼커 등 고위 참모를 비밀리에 불러 모았다. 이틀 뒤 일요일 저녁, 금융시장이 닫혀 있는 시간에 닉슨은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 그는 「국제 투기꾼들의 공격으로부터 달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코널리 장관에게 달러의 금 태환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같은 연설에서 그는 임금과 물가를 90일 동안 동결하고 모든 수입품에 10%의 추가 관세를 매긴다고 발표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 시행된 미국 정부의 임금·물가 통제였다.
조치의 겨냥은 국내와 국외가 달랐다. 임금·물가 동결은 국내 인플레이션을 겨냥했고, 금태환 정지와 수입 과징금은 주요 교역국이 자국 통화를 절상하고 무역 장벽을 낮추도록 압박하는 수단이었다. 코널리는 미국 인플레이션의 수출을 걱정하던 유럽 재무장관들에게 달러는 「우리 통화지만 당신들의 문제」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대성공이었다. 다음 날 다우존스 지수는 당시 사상 최대인 33포인트가 올랐고,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대통령의 대담함에 갈채를 보냈다. 국외에서는 걱정스러운 일방주의로 받아들여졌다.
그 뒤의 수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71년 12월 10개국 그룹(G10)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협회에서 만나 금값을 온스당 38달러로 올려 달러를 7.9% 평가절하하고 다른 통화를 절상하는 스미스소니언 협정을 맺었고, 수입 과징금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1973년 2월 달러가 다시 10% 평가절하되었고, 3월에는 유럽공동체 여섯 나라가 통화를 서로 묶어 달러에 대해 함께 변동시키기로 하면서 고정환율 체제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끝났다. 닉슨은 개혁 뒤 태환을 재개하겠다고 했지만 그런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가는 대체로 「정치적 성공, 경제적 실패」로 요약된다. 닉슨은 1972년 선거에서 압승했지만, 금태환 정지는 1973~1975년 불황,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변동환율의 불안정을 불러온 한 원인으로 꼽힌다. 볼커는 훗날 브레턴우즈 체제를 버리고 고정환율의 대안을 세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1960년대 서독과 일본 제국주의의 성장으로 미국이 1945년에 얻은 절대적 패권을 잃었고, 연이은 달러 평가절하는 세계 시장에서 미국 부르주아지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대응이었다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