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스크 쿠데타 (1918)
Omsk coup (1918)
1918년 11월 18일 옴스크에서 시베리아 카자크 장교들이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의 사회혁명당원 각료들을 체포하고, 각료회의가 전권을 넘겨받아 군사·해군 장관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을 「최고 통치자」로 뽑은 사건. 이로써 볼가와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세력은 제헌의회를 내건 사회주의자 연합 정부에서 콜차크의 군사 독재로 바뀌었다.
상세
1918년 9월 우파 국가회의에서 세워진 디렉토리는 10월 말 옴스크로 옮겨 왔지만, 11월 4일 시베리아 임시정부의 기구를 바탕으로 꾸린 표트르 볼로고츠키의 전러시아 각료회의는 디렉토리보다 훨씬 오른쪽이었다. 10월 22일 빅토르 체르노프가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당원들에게 반민주 세력에 맞서 무장하라고 호소하자, 옴스크의 군인과 우파 정치인들은 이를 쿠데타의 직접적 구실로 삼았다. 11월 17일 밤 프랑스 장군 모리스 자냉을 위한 연회에서 카자크 장교들이 제정 국가 「신이여 차르를 지켜 주소서」를 연주하라고 요구해 사회혁명당 각료들이 이들의 체포를 요구하자, 옴스크 수비대장 뱌체슬라프 볼코프 대령과 크라실니코프, 카타나예프는 거꾸로 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 블라디미르 젠지노프, 안드레이 아르구노프와 내무차관 예브게니 로곱스키를 체포했다. 디렉토리를 지키려고 나선 부대는 하나도 없었고, 사회혁명당원으로 꾸린 디렉토리 경비대대는 미리 무장해제되었으며, 카데트 빅토르 페펠랴예프는 각료와 명사들을 끌어들였다. 이튿날 아침 각료회의는 전권을 넘겨받아 비밀 투표로 콜차크를 뽑았고, 콜차크는 대장으로 진급해 최고 통치자와 최고 사령관을 겸했다. 체포된 각료들은 곧 풀려나 영국군의 도움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국외로 떠났고, 콜차크는 체포를 실행한 장교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세 사람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지도부는 콜차크를 「찬탈자」로 여겼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쿠데타를 규탄했으며, 예카테린부르크의 제헌의회 의원 대회도 항의했다가 11월 30일 일부 의원이 체포되었다. 콜차크는 11월 28일 기자들에게 “사람들은 나를 독재자라고 부른다. 그래도 좋다. 나는 이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1919년 1월 7일 쓴 글에서 “이제 콜차크 제독이 권력을 움켜쥐고 얼마 전까지의 조수들, 곧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를 쫓아냈다. 그러니 적의 진영에는 불화와 내분이 있고, 이는 우리에게 유리하다.”라고 썼다. 그러나 권력을 한 손에 모은 콜차크는 1918년 가을 볼가에서 진 백군을 추슬러 1919년 봄 대공세에 나설 수 있었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이 사건으로 반볼셰비키 운동이 백군 운동으로 바뀌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