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공화운동
Popular Republican Movement
1944년부터 1967년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기독교민주주의·중도 정당. 전간기의 민중민주당과 레지스탕스 출신 가톨릭 세력을 바탕으로 창당되어, 제4공화국 초기 공산당·사회당(SFIO)과 함께 3대 정당을 이루었다. 로베르 쉬망, 조르주 비도, 피에르 플림랭 세 총리를 배출하고 유럽 통합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1966년 장 르카뉘에가 세운 민주중도로 합쳐졌다.
상세
점령기에 피에르 브로솔레트와 장 물랭은 옛 정당을 대신할 레지스탕스 단일 정당을 구상했으나 두 사람의 죽음과 공산당의 성장으로 무산되었다. 기독교민주주의자들 앞에 놓인 여러 선택지 가운데, 조르주 비도가 지지한 안, 곧 기독교노동자총동맹(CFTC)·프랑스가톨릭청년회(ACJF)처럼 옛 정당과 무관한 가톨릭 세력을 앞세운 기독교 정신의 정당안이 채택되었고, 1944년 11월 25~26일 제1차 전국 창립대회가 열렸다. 당은 전간기 민중민주당, 질베르 드뤼와 모리스르네 시모네가 시작한 해방공화운동, 알자스의 인민공화연합 같은 지역 운동을 바탕으로 했다. 비종파적 기독교민주 정당을 표방했으나 세속주의 문제로 급진당·SFIO·공산당과 여러 차례 부딪쳤다.
1945년 24%, 1946년 6월 28%를 득표한 인민공화운동은 공산당·SFIO와 함께 초기 제4공화국을 이끈 3대 정당이 되었고, 1946년 6월 제2차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제1당이 되었다. 새로 투표권을 얻은 여성 유권자와, 비시 정권 몰락으로 갈 곳을 잃은 보수 유권자를 끌어들였고, 드골이 당원은 아니었지만 「드골에 대한 충성의 당」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헌법 논쟁에서 당은 의회 중심 체제를 받아들였고, 드골은 바이외 연설 뒤 당과 완전히 결별했다.
1947년 공산당이 정부에서 밀려나고 드골이 프랑스 인민연합을 만들자, 사회당과 기독교민주주의자들은 급진당·UDSR·온건파까지 연립을 넓힌 「제3세력」을 이루었다. 인민공화운동은 이 체제의 중심 세력으로 쉬망, 비도, 플림랭 세 총리를 배출했고, 쉬망은 1948~1953년 외무장관을 지내며 1950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제안했다. 당은 유럽방위공동체를 지지했고 인도차이나 전쟁의 주된 지지 세력이기도 했다. 1947년 이후 득표는 줄어 1951년과 1956년 총선에서 절반으로 떨어졌다. 당 의장은 모리스 쉬만(1944~1949), 비도(1949~1952), 피에르앙리 테장(1952~1956), 플림랭(1956~1959), 앙드레 콜랭(1959~1963), 르카뉘에(1963~1965)였다.
당은 알제리 문제로 갈라졌지만 1958년 드골의 복귀를 만장일치로 지지했고, 같은 해 총선에서 처음으로 10% 아래로 떨어졌다. 1962년 연방주의 유럽 모델을 거부한 드골의 유럽 정책에 반대해 장관 5명이 사퇴하면서 야당이 되었다. 1965년 대선에 출마한 르카뉘에가 15.6%를 얻자, 그는 새 정당 민주중도를 창당했고 인민공화운동은 1966년 다른 정당들과 함께 여기에 합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