Пролеткульт · 1917–1932

프롤레트쿨트

Proletkult

러시아 혁명기부터 소비에트 초기까지 존재한 대중적 프롤레타리아 문화·계몽 조직. '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프롤레타리아 문화)의 합성어로, 노동자 계급이 기존 부르주아 문화유산과 단절된 고유의 계급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이론에 기반했다. 1920년 정점에서 약 8만 4천 명의 회원과 300여 개 지부, 50만 명의 준회원을 거느렸으나, 국가로부터의 자율성을 주장하며 당 및 나르콤프로스와 충돌했고, 레닌의 비판과 1920년 11월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교육인민위원부 산하에 편입된 후 쇠퇴했다. 1932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문예조직 재편에 관한' 결정으로 공식 해산되었다.

상세

보그다노프의 이론

프롤레트쿨트는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축약어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이론에 기초한 조직이었다. 그의 주장은 노동계급이 정치와 경제에서 권력을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부르주아 문화 유산과 구별되는 자기 계급의 문화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화 영역의 자립적 발전이 정치 혁명과 대등한 과제로 설정된 것이 이 이론의 특징이다.

이 관점에서 조직의 자율성이 도출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국가나 당의 지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창작 활동을 통해 형성되므로, 문화 조직은 국가 기구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규모와 활동

혁명 직후 이 조직은 빠르게 성장했다. 1920년 정점에서 300개 지부에 약 8만 4천 명의 회원과 50만 명 규모의 일반 참가자를 두었고, 문학 서클과 연극단, 미술 작업장, 잡지 출판을 운영했다. 노동자가 직접 창작에 참여하는 것이 활동의 핵심이었다.

성과는 문학과 연극에서 두드러졌다. 노동자 출신 시인들의 작품이 출간되고 공장 단위의 연극 활동이 확산되었으며, 이후 소련 문화 정책이 다룬 대중 참여의 여러 형식이 이 시기에 시도되었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내용을 무엇으로 규정하는지에 관한 내부 논쟁도 계속되었다.

당과의 충돌

자율성 요구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이전 문화의 성과를 계승하지 않고 성립할 수 있다는 관점을 비판하고, 문화 사업이 교육인민위원부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비판에는 보그다노프의 철학적 입장에 대한 오래된 대립도 작용했다.

1920년 11월 중앙위원회 결의가 프롤레트쿨트를 교육인민위원부에 종속시켰다. 이후 조직은 재정과 인력이 축소되며 영향력을 잃었고, 1932년 4월 문학예술 조직의 재편에 관한 중앙위원회 결의로 공식 해산되었다.

프롤레트쿨트가 제기한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사회의 문화가 이전 문화의 계승인가 단절인가, 그리고 문화 창조의 주체가 전문 예술가인가 대중 자신인가라는 질문은 이후 소련 문화 정책의 여러 국면에서, 그리고 20세기 문화 이론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되돌아왔다.

관련 인물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full history: founding (September 1917 conference), peak membership (80,000 in 1920), Bogdanov/Gastev/Pletnev ideology, 1920 CC subordination, 1932 dissolution resolution
  2. 위키백과 (영문) English-language confirmation: 84,000 members/300 branches/500,000 casual at peak (1920), Bogdanov-Lenin conflict, Narkompros relationship, Kerzhentsev quotation on independent proletarian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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