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분배와 인정
Redistribution and Recognition
낸시 프레이저가 세운 사회 정의의 이원적 틀. 1995년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이래 프레이저는 오늘날의 정의가 경제적 부정의인 「잘못된 분배」를 바로잡는 재분배와 문화적 부정의인 「무시」를 바로잡는 인정을 모두 요구하며 둘은 서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무시는 심리적 상처가 아니라 동등한 참여를 막는 제도화된 지위의 손상이라는 「지위 모델」로 다듬어졌고, 주디스 버틀러·악셀 호네트와의 논쟁을 거쳐 뒤에는 정치적 대표라는 셋째 차원이 더해졌다.
상세
프레이저는 1995년 《뉴레프트리뷰》 I/212호의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포스트사회주의」 시대 정의의 딜레마」를, 「인정을 위한 투쟁」이 20세기 말 정치 갈등의 전형적 형태가 되어 가고 있다는 진단으로 시작했다. 이런 갈등에서는 집단 정체성이 계급 이해를 대신해 정치 동원의 주된 매개가 되고, 문화적 지배가 착취를 대신해 근본적 부정의로, 문화적 인정이 사회경제적 재분배를 대신해 부정의의 처방이자 정치 투쟁의 목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정 투쟁은 소득·재산·유급 노동·교육·의료의 물질적 불평등이 심해지는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프레이저는 정체성 정치를 통째로 받아들이지도 버리지도 말고, 평등의 사회 정치와 일관되게 결합할 수 있는 차이의 문화 정치만 가려 옹호하는 비판적 인정 이론을 세우자고 했다. 그 출발 전제는 오늘날의 정의가 재분배와 인정을 모두 요구한다는 것이었고, 문화적이면서 사회경제적인 부정의의 축으로 젠더와 「인종」을 전형으로 들었다. 이 논의는 1997년 책 『중단된 정의』에 묶였다.
이 틀에서 부정의는 두 형태로 나뉜다. 자원의 더 공정한 분배에 관한 분배 정의에 대응하는 부정의가 잘못된 분배이고, 사회적 정체성과 집단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정의에 대응하는 부정의가 무시다. 프레이저는 1960~70년대 이후 많은 사회 정의 운동이 인종·젠더·섹슈얼리티·민족을 근거로 인정을 요구하면서 무시를 바로잡는 데 쏠린 나머지, 끈질긴 잘못된 분배와 싸우는 일의 중요성이 가려졌다고 보았다.
이 구분은 주디스 버틀러와의 논쟁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버틀러는 「단지 문화적인」(《뉴레프트리뷰》 I/227, 1998)에서 프레이저의 『중단된 정의』와 1995년 논문을 실명으로 다루며 성의 규제가 생산양식 자체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이저는 답글 「이성애주의, 무시, 자본주의」(I/228, 1998)에서 분배의 부정의와 인정의 부정의가 똑같이 일차적이고 실재하는 두 해악이라고 하면서, 무시당한다는 것은 남의 의식적 태도 속에서 낮게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법·사회복지·의료·대중문화에 제도화된 해석과 평가의 양식 때문에 사회생활에 동등한 참여자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무시는 심리 상태가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관계이며, 본질적으로 지위의 손상이고, 잘못된 분배와 함께 나타날 수 있지만 분석적으로 구별되고 개념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둘이 서로 바뀌는지는 사회 구성체에 달려 있어서, 지위가 곧 분배 원리인 자본주의 이전·국가 이전 사회에서는 무시가 곧 잘못된 분배이지만, 특화된 경제 관계가 제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위와 계급이 갈라질 수 있다고 했다.
프레이저는 2000년 「인정을 다시 생각한다」(《뉴레프트리뷰》 2기 3호)에서 인정 투쟁이 재분배 투쟁을 보완하기보다 밀어내는 「대체」의 문제와, 집단 정체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굳히는 「물화」의 문제를 짚었다. 그리고 정체성이 상호 인정 속에서 대화적으로 구성된다는 헤겔적 생각에서 출발하는 통상의 「정체성 모델」 대신 「지위 모델」을 내놓았다. 지위 모델에서 무시는 집단 정체성의 폄하가 아니라 사회생활에 동등하게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종속이며, 인정의 정치는 무시당한 쪽을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세우는 정치가 된다. 이 무시는 떠도는 문화적 표상이 아니라 참여를 가로막는 문화 규범에 따라 상호작용을 규제하는 사회 제도를 통해 저질러진다. 그 규범적 기준이 「참여 동등성」, 곧 모든 사람이 공적 생활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상이며, 재분배는 그 객관적 조건을, 인정은 상호주관적 조건을 보장한다.
2003년 프레이저와 악셀 호네트는 공저 『재분배냐 인정이냐? 정치철학적 논쟁』을 냈다. 호네트는 상호주관적 인정 관계를 사회관계 이해의 우선 범주로 삼아 재화 분배를 둘러싼 불만도 결국 인정을 위한 투쟁이라고 본 반면, 프레이저는 인정 같은 윤리적 범주를 재분배 같은 구조적 사회·정치적 범주보다 앞세우는 것을 비판했다. 프레이저는 다국적 기업이 이윤을 위해 공장을 옮기고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처럼 무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체계적 특징에서 비롯하는 부정의가 있다고 보았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프레이저는 틀을 넓혔다. 2005년 「세계화하는 세계에서 정의의 틀을 다시 짜기」(《뉴레프트리뷰》 2기 36호)는 정의의 「무엇」만이 아니라 「누구」, 곧 정의가 적용되는 단위가 영토 국가와 그 시민이라는 전제가 흔들린다고 보았고, 같은 해의 「페미니즘 상상력의 지도: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대표로」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 정치적 대표를 셋째 차원으로 더했다. 이로써 사회 정의는 재분배·인정·대표라는 서로 얽힌 세 차원을 가지며, 그 셋이 모두 갖추어질 때 각자가 모든 사회 영역의 상호작용에 동등한 참여자로 참여하는 참여 동등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프레이저의 정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