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노동자·병사 평의회 대회
Reich Congress of Workers' and Soldiers' Councils
1918년 독일 11월 혁명으로 생긴 노동자·병사 평의회의 전국 대회. 제1차 대회는 1918년 12월 16~21일 베를린 프로이센 하원 건물에서 열렸고, 대의원 약 490명 가운데 다수파 사회민주당이 298명, 독립사회민주당이 101명이었으며 스파르타쿠스단은 10명뿐이었다. 대회는 국민의회 선거를 1919년 1월 19일에 치르기로 하고, 평의회 체제를 헌법의 토대로 삼자는 에른스트 도이믹의 동의안을 344 대 98로 부결해 평의회 공화국 대신 의회 민주주의의 길을 열었다. 1919년 4월의 제2차 대회는 「노동 회의소」를 요구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상세
소집과 구성
11월 혁명 중 독일 전역에 생긴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처음에는 전국 중심이 없었다. 스스로를 임시 지도부로 여긴 베를린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가 전국 대회를 소집했다. 통일된 선거 방식은 없었고 대의원 선출은 각 지역 평의회에 맡겨졌다. 대체로 주민 약 20만 명당 한 명, 군인 10만 명당 한 명이었다.
대의원 490명(노동자 평의회 406명, 병사 평의회 84명) 가운데 다수파 사회민주당 지지자가 298명, 독립사회민주당이 101명이었다. 독립사회민주당 안의 스파르타쿠스단 지지자는 10명에 지나지 않았다. 여성 대의원은 두 명뿐이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의원이 되지 못했고, 두 사람을 발언권 있는 손님으로 받아들이자는 제안도 부결되었다. 개회 보고는 베를린 집행위원회 의장이자 혁명적 오프로이테의 지도자 리하르트 뮐러가 맡았다.
12월 19일의 표결: 평의회냐 국민의회냐
대회의 중심 쟁점은 새 국가의 권력을 평의회에 둘 것인지, 보통선거로 뽑는 국민의회에 맡길 것인지였다. 다수파 사회민주당의 막스 코엔이 국민의회 선거를 1919년 1월 19일에 치르자고 제안했고, 대회는 압도적 다수로 이를 채택했다. 인민대표평의회가 생각한 것보다도 이른 날짜였다. 반면 독립사회민주당 좌파이자 혁명적 오프로이테의 에른스트 도이믹은 평의회 체제를 독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의 토대로 삼고 노동자·병사 평의회에 최고 입법권과 집행권을 주자는 동의안을 냈으나, 이 안은 344 대 98로 부결되었다. 뮐러는 뒷날 이 대회가 「정치적 자살 클럽」이 될 줄은 몰랐다고 썼고, 룩셈부르크는 대회를 「반혁명의 순순한 도구」라 불렀다.
중앙평의회, 사회화, 함부르크 조항
대회가 뽑을 중앙평의회는 의회를 대신해 정부를 감독할 기구였다. 그 권한을 두고 다수파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이 맞섰고, 독립사회민주당 좌파는 하제의 반대를 누르고 중앙평의회 선거를 거부했다. 그 결과 17명의 중앙평의회는 다수파 사회민주당원만으로 채워졌고, 1919년 2월 4일 권한을 바이마르 국민의회에 넘겼다.
다른 쟁점에서는 대회가 더 왼쪽으로 결정했다. 광업처럼 성숙한 산업의 사회화를 곧바로 시작하라고 결의했고, 군대 문제에서는 「함부르크 조항」을 채택해 지휘권을 중앙평의회의 통제 아래 두고, 계급장을 없애며, 병사가 지휘관을 뽑고 병사 평의회가 규율을 책임지게 했다. 그러나 최고사령부의 빌헬름 그뢰너가 최후통첩으로 이 조항을 야전군에서는 적용하지 않게 만들었고, 이를 둘러싼 갈등은 독립사회민주당이 인민대표평의회에서 물러나는 데 한몫했다.
제2차 대회 (1919년 4월)
대회는 평의회 체제를 헌법의 토대로 삼기를 거부하면서도 평의회를 의회 체제 안에 제도로 넣으라고 요구했다. 이는 1919년 봄 평의회 체제를 지키려는 마지막 시도였던 3월 파업의 요구이기도 했다. 리하르트 뮐러 등의 발의로 1919년 4월 열린 제2차 대회는 「노동 회의소」 설치를 요구했지만, 국민의회 선거가 다수파 사회민주당·중앙당·독일민주당의 바이마르 연정을 낳은 뒤라 실현될 가망이 없었다.